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렌지나무 Oct 13. 2023

인생의 빈 공간


빈 공간은 왠지 파란색일 것 같다. 균일한 채도와 질감의 파랑. 무심한 물감 자국 같으면서도 잔잔한 호수같은, 튀어나온 동시에 패인, 그런 모습말이다.


내 인생에는 텅 빈 공간이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채워진 공간이 나에겐 텅 비어있을 때, 상대방과 대화하면서 그걸 같이 확인하순간이 당혹스럽다.


오늘 점심을 먹으면서도 약간 피곤했다. 내 인생의 빈 공간들만 짚어가면서 하는 대화. 답은 '우울증' 하나밖에 없는데도 애써 다른 이유들을 짜내야 했다. 상대방은 나이도 많은 분이고, 우울증에 관한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사이도 아니라서.


나는 텅 비어있는 사람이나 다름없다. 내 인생에는 수많은 경험이 거의 없으니까. 간혹 우울의 에피소드 사이에 있는 경험들도 청소기에 빨려들어가듯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내가 현재에 머물 수 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현재 좋아하는 것들에 집중하면서 조금씩 살아가고 있다. 내가 어른의 옷을 걸친 아이처럼 느껴질 때도 많지만, 한순간에 몸이 자라서 그 옷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걸 안다. 그리고 만회하려하면 우울증의 덫에 빠진다는 생각처럼, 어른이 되어있어야 할 과거의 시간들을 만회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내가 인생 경험이 거의 없어서 순수하다면 순수한거고 나이에 안맞게 바보같다면 바보같겠지만...  사실 그래서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재미보다 스스로가 바보같고 이상한 사람같아서 위축될 때도 많고, 창피할 때도 있고, 애처럼 눈물이 날 것 같은 때도 있다.


그래도 나는 지금의 내가 있는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 모르면 어때, 바보같으면 어때, 어른의 옷을 걸친 일곱살짜리같으면 어때... 그러면서 축 늘어진 소매를 걷어올린다.


바보 이반도 사는데 문제는 없었잖아.

내 속도대로 살면 되는거야.

속도가 다르면 어쩔 수 없는거지.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오늘 하루를 마친다.


감정은 파도같아서 밀려오면 또 멀어지게 되어있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만회'라는 불가능한 목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