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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지나무 Oct 25. 2023

평범하게 네 곁에 있고 싶어

https://youtu.be/tqvnc6KdbN8?si=aXUkNTTIQhiriaWc


이 곡의 원제는 我愿意平凡的在你身旁로 王七七의 노래이다. 중국어 가사도 좋은데, 우리말로 번안한 가사도 꽤 좋다.


우울증약을 먹으면 약간 이런 기분이 든다. 즐거울 일이 없는데도 잔잔하게 즐겁다. 즐거우면 뭔가를 할 에너지가 생긴다. 그래서 친구를 만나거나 혼자 전시회를 보러 갈 수도 있다. 그러다보면 실제 즐거운 일이 생긴다. 결국 진짜 즐거워진다.


우울증약의 장점은 이런 것 같다. 뭔가를 할 수 있게 부스터 역할을 해준다는 것. 그 다음은 내가 해야될 몫이다. 내가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만들고, 내가 보람있는 직업을 갖기 위해 노력하고, 위안을 나눌 수 있는 친구를 만드는건 내가 내 의지로 해나가야 한다. 그래야 우울증약도 의미가 있다.


우울증약을 안 먹고 우울증에서 벗어나본 경험도 나름  장점이 있다. 나 스스로가 많이 정리된 것도 좋고 (불필요한 것, 나쁜 것들이 다 타버려서...) 우울증이 공격해올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알게된 것도 좋다.


그래서 약을 먹는 지금, 약과 함께 잘 노력해나가는 것 같다. 약이 기분을 밀어주면, 나는 재밌는 일들로 기분을 띄워준다. 그러면 그날 하루는 잘 마무리할 수 있다. 하루가 잘 끝나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덜 어려워진다.


요새 마음아픈 일이 있지만 막상 마음이 아프진 않다. 슬픔을 느낀다면, 약을 먹었을 가능성이 높다. 가끔 약과 약의 텀이 길어질 땐 그 사이에 슬퍼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다시 약을 먹어 슬픔을 눌러버린다. 그러면 내 마음은 고요하고 잔잔해진다.


약이 들어가면 나는 나에게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잊고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다. 공허한 미소인데, 신기한게 웃으면 또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진다.


요즘은 그렇게 살고 있다.


거의 처음 해보는 사회생활에 적응하고 대학원 면접준비를 하면서 마음의 슬픔까지 느낄 여유는 없기 때문이다. 잠시 치워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 약으로 우울과 불안을 밀어내버렸다. 물티슈로 책상 위의 먼지를 닦아내는 것처럼.


약이 없었더라면 슬픔을 곱씹고, 계속 생각하는만큼 슬픔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을 것이다. 한때는 슬픔을 즐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슬픔에 공간을 내어주기 싫다.


솔직히 지금은 우울해서 약을 먹는건 아니다. 이 정도는 우울증이라고 할 수도 없다. 웃기지만, 마음의 아픔을 떨궈내려고 약을 먹는다. 나는 슬픔, 불안, 고통이 있는 땅을 벗어나 허공을 걷는 기분으로 살아간다. 약 덕분에 참을 수 없이 가벼워졌다.


내 감정을 못 느끼는게 정상인지 스스로도 의문이 있지만, 나는 계속 약을 먹으려고 한다. 진통제가 필요하다. 이미 우울증으로 너무 아팠어서 지금은 조금이라도 아프기가 싫다. 약이 주는 가짜 감정에 기대어본다.


어떤 면에선 진짜 내 감정이란 것에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사람의 감정은 뭐가 진짜인지 모를만큼 복잡하다. 미소지으면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고,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약으로 잡아 기분은 지하를 뚫고 들어가지 않는다.


우울증을 이겨내기 위해 어차피 기분이나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데, 그 길을 약으로 쉽게 간다고 해서 크게 다를건 없지 않을까.


너무 생각이 많아도 좋을게 없다. 크레파스로 듬성듬성 그린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나는 현재 기분 좋은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머지는 대충 얼버무리면서 산다. 너무 멀리 앞을 내다보지도 않고 너무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냥 하루하루를 채워나간다.


평범하기 힘든 과거가 있다고 해도, 그냥 지금은 평범하게 이곳에 있고 싶다. 인생의 앞뒤를 다 잘라버리고 지금 나만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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