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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신의 이름은 갈증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다. 한 소설가가 소설의 소재를 찾기 위해 바다 위에서 최장 표류 경험이 있는 주인공, 파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작된다. 파이의 아버지는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는 사업가다. 인도 정세와 자녀들의 교육 문제로 캐나다 이민을 결정하고 동물들과 함께 캐나다 행 배에 오른다. 

 폭풍우 치는 어느 날 밤, 배가 침몰하게 되고 파이가 탄 구명보드에 얼룩말과 하이에나, 오랑우탄과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크가 타게 된다. 원래 호랑이의 이름은 Thirsty인데, 처음 동물원에 들어올 때 실수로 서류상에 이름이 사람과 바뀐 것이다.

 좁은 구명보트 안에서 하이에나가 얼룩말과 오랑우탄을 잡아먹고, 호랑이가 하이에나를 잡아 먹는 참상이 펼쳐지고 결국 호랑이와 파이 단 둘만이 남아 외롭고 긴 표류를 하게 된다.

파이는 생명을 위협하는 호랑이를 피하고, 싸우고, 죽이려고도 해보지만 결국 길들여서 공생하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리고, 리처드 파크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았다고 말한다.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위험 보다 더 긴박한 위협으로 긴장을 놓치지 않았기 때문에 살았고, 나중에는 죽어가는 호랑이 동료를 지키기 위해 살았다.

 처음에는 구명보트에 실린 식수와 깡통 비스킷으로 연명하다가 그것마저 큰 고래의 출현에 다 잃게 되고, 나날이 더 원시적인 생태계와 맞서야만 했다. 배고픔은 사람을 변하게 해서 채식주의자인 파이는 날 생선을 허겁지겁 먹게 되는데, 본능적으로 큰 생선을 그물로 건져올려서 도끼로 내려치고는 죽어가는 물고기의 눈을 보면서 미안하다고 흐느낀다. 그리고 비슈뉴 신이 물고기로 변신해서 우리를 살려주셨다고 감사 기도를 한다.

 그 작은 구명보트 위에서도 나날이 살림살이가 늘어가는 모습은 또 다른 즐거움을 준다. 예전에는 몰랐던 한 뼘 햇볕 가리개와 생존 일지를 적는 수첩 하나, 볼펜 하나의 소중함을 알아간다.


 


 다시금 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한 파이는 모든 것을 다 잃은 저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절규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기적을 보았다고 외치기도 한다.

 정신을 잃고 도착한 무인도에서 바다 위 보다는 안정된 평화를 찾는가 싶더니 바다 위에서 죽더라도 떠나야만 되는 이유를 알게 된다. 그 섬은 낮에는 희망이지만 밤에는 연못의 물이 산성으로 변해서 짐승들을 잡아먹는 식충섬이었다. 이 때에도 신앙심 깊은 파이는 이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신께 감사드리는 것을 잊지 않는다.


시야가 흐려질 만큼 죽음에 임박했을 때 육지에 닿게 되고, 리처드 파크는 숲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곧 사람들에 의해서 구조된다.

 침몰된 배의 유일한 생존자인 파이를 취재하러 기자들이 온다. 기자들은 파이가 말하는 호랑이나 하이에나, 얼룩말, 오랑우탄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다. 결국 사람들이 믿을만한 이야기로 바꾸어서 말을 한다. 얼룩말을 배에서 만났던 친절한 채식주의자 불교도로, 하이에나를 인정 없고 매몰차던 배의 요리사로, 자신도 결국 잡아먹히고 말지만 얼룩말이 먼저 잡아먹힐 때 격렬하게 날뛰며 반대하던 오랑우탄을 엄마로, 오랑우탄을 죽인 하이에나를 죽이는 호랑이는 자기 자신으로 감정이입을 해서 각색한다. 그제서야 기자들은 믿을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자리를 떠난다.

 이야기를 마친 후 소설가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감탄하면서

"당신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이군요?" 하자, 파이는

"아니요, 그 다음은 당신의 이야기에 달렸소." 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이야기 되고나면 그 이야기는 또 다른 누군가의 가치와 믿음에 의해 편집되어 새로운 이야기가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야기 안에 살아있는 생존에 대한 갈망, 목마름, 고통, 희망, 믿음과 같은 감정들이 이야기를 실어 나르는 동력이 될 것이다.

 어릴 때 부터 카톨릭, 힌두교, 이슬람… 무슨 종교든 쉽게 잘 믿고 잘 받아들이던 파이는 예수님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하고, 오늘은 알라신을 알게 되었다고 하며, 입 속에 우주가 있다는 크리슈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면서 자랐다. 파이의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감상적인 면이 마음에 안 드는지 중요한 것은 과학이고 이성이라며 강인하지 못한 것을 꾸짖는다.

 그런 파이와 길고 외로운 항해를 했던 사나운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크의 원래 이름 -영화 도입부에서 복선처럼 살짝 안내되었던- 인 Thirsty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갈증, 갈망, 목마름… 생을 향한 희망을 놓지 않았던 주인공 파이가 선택한 신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진정한 욕망의 진전과 성취는 이성적인 계획 보다는 직관적이고 즉흥적인 몰입에 의해 이루어진 것일 때가 많다. 결과를 의식하지 않고 과정에서 열정을 느끼면서 해 나가는 것이다. 

 머리로 계획했던 기간은 반도 안됐는데 마음속에서 새로운 문에 가까이 다가왔음이 느껴지던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오래 전에 수업했던 수강생으로 부터 다시 강의를 듣고 싶다는 연락이 왔고, 이런 것이 나의 기쁨과 세상의 요구가 만나는 지점, '소명'이 아닐까 마음속에 품고 있던 씨앗이 다시 움트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섣불리 움직이지 말자고 다짐하고 견디고 있을 무렵, 새벽 마감 청소를 하면서 결정적인 동영상 강의를 듣게 되었다. 이 영상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고,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영상이었는데 내 마음의 욕동이 차오른 시기에 만났기 때문에 이미 발아한 씨앗이 부드러워진 땅을 차고나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 강연을 듣자마자 ‘언젠가’ 좀 더 준비가 되면 하려고 했던 일을 당장 착수했다. 

 그 영상은 바로 14분 36초 짜리 스티브 잡스의 스텐포드 졸업식 축사이다. 이 연설은 그 이후에도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마다 그 어떤 것도 아닌 ‘내 안의 목소리’를 따르도록 안내하는 나침반이 되어주고 있다. (인상 깊은 몇 대목들을 캡쳐해서 편집한 것이다.)


 '순전히 호기심과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훗날 정말 값진 경험이 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가슴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이미 여러분의 가슴과 영감은 여러분이 되고자하는 바를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을 따라갈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험한 길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모든 차이를 빚어냅니다. 여러분들은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든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합니다. 때로는 인생이 배신하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저를 계속 움직이게 했던 힘은 제 일을 사랑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그 일이 진정한 만족을 줄 것입니다. 위업을 달성하는 것은 당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뿐입니다. 그 일을 아직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세요. 현실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진심을 다해서 찾아내면 그 때는 알게 될 것입니다. 모든 위대한 관계들이 그러한 것처럼 시간이 갈수록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 추구하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인생의 결단을 내릴 때 마다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여러분은 죽을 몸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죽음 앞에선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만 남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타인의 생각의 결과물에 불과한 도그마에 빠지지 마십시오. 타인의 견해가 여러분 내면의 목소리를 삼키지 못하게 하세요. 모든 외부의 기대 자부심, 수치스러움과 실패의 두려움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 등 그 무엇이든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그러므로 계속 추구하십시오. 안주하지 마십시오.'




 지금까지의 내 삶에서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들의 본질적인 힘은 모두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확신이 아닌 호기심과 직관을 믿고 저지른 일이었다. 그 일들은 모두 불안을 감내해야 했지만 그런 방식이 바로 현인들이 말하는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일’이었고, 자신의 욕망을 따르고 그에 책임을 지는 일은 결과를 떠나 후회하지 않고 자족할 수 있으며, 다음으로 가는 디딤돌이 된다. 반면에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되는 일들은 현실에 안주하려는 상투적이고 습관적인 나, 현실의 이미지에 만족하는 결정이었다. 그 선택의 심층적인 심리적 현실은 타인의 목소리와 타인의 발자국, 타인의 지문으로 얼룩진 길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런 일들의 표층적인 모습은 현실적인 안정과 크고 빛나는 결과를 제시했다. 그런 일들에 착수했을 때 머지않아 내 자리가 아닌 것처럼 불편했다. 보여지는 결과를 떠나 존재적인 만족감이 없으니 늘 공허했고, 또 다른 다음을 준비하게 했다. 준비한 곳에 힘겹게 도착해서는 ‘지금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음을 준비했다. 원하던 모든 것이 다 있는데 내가 없는 기분이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잠』시작 부분에 이런 질문이 나온다.

 ‘20년 전으로 돌아가 젊었을 적의 자신을 꿈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꿈속에 당신에게 말을 걸 수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무슨 말을 하시겠어요?’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확고하며, 이 답은 20년 후에도 적용된다. 간절함을 강조하게 위해 백범 김구 선생님의 연설문의 형식을 오마주한다.

 "니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

하고 말할 것이다. 

그 다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니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라.”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너 자신이 진실로, 순수하게, 네 본성이 좋아하는 일을 하라.

잘 안된다면 다시 한 번 네 일을 계속해 나가라.

그리고 이전보다 더 열심히 노력해 보라.‘

만약 그것을 못 찾는다면 끊임없이 추구하고 시도하라.”

하고 말할 것이다.

그 간절할 미래를 생각하며 유일한 현실인 지금 여기에 존재하라.

계속 갈망하고, 여전히 우직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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