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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신은 길 위에 있다

 

 왜 신인가?

 현대 문명이 더 이상 발달 할 수 없을 만큼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 신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이 우리 삶에 어떤 효용가치가 있나? 

 인간의 현존은 언제나 삶의 한 근본 윤곽을 기반으로 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다운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들을 포함하는 기본적인 틀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간다움을 유지하며 바르게 설 수 있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의미로 충만한 삶은 근본경험의 담지자인 신의 모델을 통해서 발견된다. 

 삶의 근본방식은 인간 자신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전체에서, 한 집단의 정신세계에서, 전체정신을 통해 고양되고 발견된다. 그 중심에 신적인 모델이 있다. 신들의 모델을 통해 인간다움의 척도가 마련된다. 그래서 신인 것이다.


 옛 사람들은 길을 잃었을 때 별을 보고 길을 찾았다. 우리의 귀가 더 이상 듣지 못하도록 퇴화되었을 뿐 별은 지금도 소리를 내고 있다. 

 인지학의 창시자 루돌프 슈타이너에 의하면 옛 사람들이 지금 현대인의 의식으로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보고 들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잠들어서 깨어날 때까지 했던 체험에서 무엇인가가 여전히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의 경우에는 잠이 현대인의 그것처럼 단순히 다음 날을 위한 긴 휴식으로 끝나지 않고,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영적으로 생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잠의 영역에서 일하는 영적인 힘이 낮의 영역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이후에 사람들은 그런 힘을 잃고 나서 옛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경험했던 것을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이나 명칭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신은 이론이나 개념적인 방식이 아니라 직관적인 형태로 체험되었다. 현대인들은 그 직관적인 명료한 사고의 힘을 잃었다. 19세기 제국주의의 팽배로 서구열강들이 세계 곳곳을 점령하여 식민지화 하면서 차츰차츰 의지가 약해졌으며, 고대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유산이 19세기 말에 탕진되었다. 

 사고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사고로 세계를 형성할 수 있어야 하는데, 사고내용이 그렇게 할 의지를 단련시킬 힘을 더 이상 얻지 못하게 된 것이다.

 고대인은 생각와 감정과 의지가 따로 따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이어져 있었으나 의지의 약화로 점차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분리되기 시작했다. 약화된 의지는 감정을 억압하고, 억압된 감정은 메마른 사고를 낳았다.


 19세기가 끝날 무렵에는 한 사람은 물질주의자, 한 사람은 관념주의자, 사실주의자, 감각주의자……. 모두 자신의 입장을 지니게 되었다. 상투적인 언어, 관습, 관념의 지배하에 정신적 보고인 바다가 얼기 시작했다. 정신적 빙하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그 얼음판은 얇았지만 사람들이 자체적 무게감을 잃어버렸으므로 얼음판을 깨뜨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또한 사람들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버렸기 때문에 그 얼음판을 녹이지도 못했다. 정신의 보고인 무의식의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얼음판, 정신의 빙하를 녹일 수 있는 인간의 무게감과 뜨거운 심장이 회복되어야 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아직 말하지는 못하지만’ 뜨거운 심장을 지닌 젊은이들이 얼음판을 녹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럴 때 그 젊은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내 입장이다.” 

 라고 느끼지 않고, 

 “내 발 아래에 바닥이 없어진다.”

라고 《느낀다》고 말이다.

“내 심장의 온기가 상투어, 관습, 틀에 박인 일상에서 생겨난 얼음을 녹였다.”

 라고.


 루돌프 슈타이너의 표현대로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심장이 없는》생각이 되려고 애쓰는 생각들’이다.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것은 깊은 영혼 본성이 갈망하는 것,
그것을 다시 찾아내야 한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한다. 

 “어떤 비밀이 가장 중요합니까?”
라는 질문에 괴테는 이렇게 대답했다.
“분명하게 현시되는 것!”
그것을 위한 눈이 열려야 비로소 현시된다. 



모든 것이 과학적으로 발전을 이룰 만큼 이루어진 지금, 이미 밝혀진 것들의 융합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야하는 통합의 시대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개인 각자의 내적인 문제, 내적인 갈망을 진정한 인간상의 공통적인 중심에서 찾아야 하고 발견해야 한다. 

 “어떻게 인간 영혼 내에서 가장 원초적인 정신 체험에 이를 수 있는가?”

 “인간이 자신 내면에 지닌 가장 깊은 것을 어떻게 일깨울 수 있는가?

 “어떻게 인간이 스스로 깨어날 수 있는가?”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진실된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시금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상태이다. 미와 추, 선과 악, 진실과 허위……. 그런 것들에 대해 흐릿하게 느낀다면 강하고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상태에 다시금 이르러서 자신의 전체 인간으로 그 느낌 속에 존재해야 한다. 마음 없고 영혼 없는 습관적이고 상투적인 말들을 멈추고, 말 속에 다시금 심장의 피가 흐르도록 해야 한다.

 틀에 박힌 일상을 부스러뜨리기 위해서는 머릿속의 생각들이 심장의 피와 함께 움직여야 한다. 

 15세기 이래로 지상적인 것에서 인간을 일깨울 만한 것이 더 이상 없으므로 인간 자신의 내면에 있는 초지상적인 것, 그것에서 찾아야만 한다. 수많은 정보와 작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계획과 아이디어의 홍수 속에서 빠져나와 진정으로 자신의 내면에서 원하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내적으로 깊이 체험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진정으로 아주 구체적인 형태에서만 찾을 수 있다. 그런 형태로만 찾아야 한다.

직접적인 시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의 의미에서 느끼도록 습관을 들여야 한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는 제목을 스스로 부여하고 시작했던 정신분석 초기에 나왔던 인상적인 꿈, 커다란 노랑색 스마일을 기억한다. 투명한 유리재질의 거대한 스마일은 아주 작은 퍼즐 조각들로 일체화되어진 구조물이었다. 

 어릴 적, 뭐든지 재미있고, 잘 놀고, 잘 배우고, 잘 하던, 꿈 많던 아이는 자라면서 불안장애, 난독증과 같은 신경증적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진정한 내 안의 욕구를 회피하고 세상이 원하는 일에 모든 에너지를 쏟게 됨으로써 점점 진정한 나 자신과 멀어졌다. 내 안의 소리를 무시하고 타인의 지문으로 얼룩진 길을 간데 대한 댓가는 탈진과 무기력,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점철되는 삶의 무의미로 나타났다. 

 붉은 진흙길 위에서 길을 잃고 서 있는 나의 손을 잡아서 빛나는 스마일이 있는 곳으로 이끌어준 프랭크라는 아이에 대해 오랫동안 생각했다. 처음에는 누구일까? 호기심을 품었고, 삶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통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으면서 꿈속의 아이, 프랭크가 의미치료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이라고 생각했다. 

 깊은 지하 동굴로 떨어진 듯한 암담한 상황 속에서 기쁨이란, 그것을 가져다주는 상황과 조건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내가 그것을 만나려고 하는 순간 항상 내 안에 있는,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기쁘게 발견했다. 

 암벽을 타는 사람이 다음 붙잡을 돌을 정확하게 바라보면서 작은 돌 하나에 의지해서 온 몸의 무게중심을 옮겨가듯이 매일 매일 하루를 위한 힘으로서의 단어를 하나씩 하나씩 붙잡아 온 몸으로 삶을 밀고나가는 동안, 단어는 문장이 되고, 문장은 한권의 책이 되고, 책은 쌓이고, 쌓인 책은 작은 공부방이 되어 나와 같은 어려움을 가진 과거 직장 동료들과 함께 나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는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 길을 오는 동안 난독증도, 두려움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L.프랭크 바움의 소설『오즈의 마법사』는 동화의 형식을 빌어 우리 삶의 여정을 잘 보여준다. 캔자스의 농장에 사는 도로시는 강아지 토토와 함께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오즈라는 마술나라로 가게 된다. 도로시는 고향 캔자스로 돌아가기 위해서 마법사 오즈를 만나러 길을 떠난다. 그 여행길에서 두뇌가 없는 허수아비, 심장이 없는 양철나무꾼, 겁쟁이 사자를 만나서 친구가 된다. 도로시와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는 험난한 모험 끝에 드디어 에메랄드 캐슬의 마법사 오즈를 만난다. 하지만 오즈는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줄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도로시와 친구들은 소원을 이루게 된다. 모험을 하고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기 안에 있는 진정한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두뇌를 갖고 싶어 하던 허수아비는 어려운 상황에서 지혜를 발휘했다. 심장이 없어서 슬퍼하던 양철 나뭇꾼은 누구보다도 따뜻한 마음으로 친구들을 위로했다. 겁쟁이 사자는 두려운 상황에서 앞장서서 난관을 극복했다. 결국 자신을 변화시켜주는 마법은 에메랄드 캐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었다.

 그 마법의 보물은 모험을 떠나지 않았다면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 안의 보물을 길 위에서만 찾을 수 있다.


 진흙길에 서 있는 내 손을 잡아준 아이는 단지 빅터 프랭클 뿐만이 아니었다. 뒤늦게 발견하면서 놀랐던 사실은 읽을 때 마다 언제나 구체적인 힘이 되어준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도 ‘프랭크’였고, 오즈의 마법사를 쓴 ‘프랭크’ 바움도 프랭크였다. 가장 어렵고 가장 숭고한 감정인 용서의 의미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그림책, 닐 도날드 월쉬의『작은 영혼과 해』의 그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 작가도 ‘프랭크’ 리치오였다. 

 어두운 지하와 감옥은 알의 내부와도 같은 상징성 있는 공간이며, 그 좁고 어두운 공간은 광활한 넓음과 밝음을 전제로 존재한다. 탈출의 긴박함은 끊임없이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우리의 실존적인 상황에 맞닿아 있는 행위이다. 그 어둠 속에서 여러 번 보았던 영화, 『쇼생크 탈출』의 감독이 ‘프랭크’ 다라본트 라는 사실도 글을 쓰는 동안 참고자료를 정리하면서 발견했다. 

 이렇게 많은 ‘프랭크’들이 속출하자 이제 더 이상 꿈 속에서 내 손을 잡고 밝고 맑은 대형 스마일 앞으로 데려다 준 조력자, ‘프랭크’가 단지 빅터 프랭클이라고 단정지을 수가 없게 되었다. 빅터 프랭클로 부터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를 가진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는 커다란 명제를 받고 떠난 길에서 만난 수많은 사람들, 도움을 받을 때는 그가 ’프랭크‘인지도 몰랐던 존재들이 뒤늦게 ’프랭크‘로 드러났다.

 이제 ‘프랭크’라는 이름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 없는 모든 것들이 다 나의 ‘프랭크’이며, 그 모든 것을 붙잡고 여기까지 왔음을 알게 되었다. 

 이름 없는 그 작은 조각들이 어둠 속에서 언젠가 성취하게 될 것이라고 바라보았던 크고 빛나는 대형 스마일을 이루는 개체들이었다. ‘언젠가’ 하나 될 수 있지만 ‘아직’은 하나는 아니라고 생각했던 크고 작은 조각들, ‘우리는 이미 하나’ 였다.


도마복음에 나오는 천국의 비유이다.


97_음식 가득한 항아리를 가진 여인의 비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나라는 음식이 가득 담긴 항아리를 옮기는 여인과 같다. 

먼 길을 가는 동안 항아리의 손잡이가 깨져 

음식이 그녀의 등 위에서 길로 쏟아졌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집에 도착해 항아리를 내려놓은 다음에야

여인은 비로소 항아리가 텅 비었음을 알았다.“


 항아리에 든 음식을 이고 먼 길을 가는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일한 댓가로 받은 음식이 담긴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멀고 무더운 길을 걸어갔다. 엄마를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누어줄 마음은 멀고 힘든 길을 기쁨으로 재촉하게 했다. 도착했을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깨진 항아리 뒤로 음식이 다 쏟아져 항아리가 텅 빈 것을 알았다. 

 우리는 힘들게 일한 댓가로 받은 음식을 이고 멀고 험한 길을 걸어와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 곳’에 하늘나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가 이 여인과 같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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