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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빛과 소금

 

 유치원에서 아이들 생일 카드를 쓸 때, 시작은 ‘예쁜 공주님’, ‘멋진 왕자님’ 으로, 마지막은 ‘세상에 꼭 필요한 빛과 소금이 되길 기도할게.’ 였다. 일곱 살 졸업하는 아이들에게도 축사의 마지막 문장은 꼭 ‘빛과 소금’이었다.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대체로 이렇게 썼다. 여러 해에 걸쳐 많은 아이들에게 생일 카드를 쓰면서 이 보다 더 좋은 축하 메시지는 찾지 못했기 계속 쓰게 된 것이었다.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자신을 닮게 만들었다거나 사람은 누구에게나 신성이 있다는 말은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들의 놀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모든 아이들은 자신이 공주고 왕자임을 당연하게 알고 있다. 여자 아이들은 공주 놀이를 하는데 여념이 없다. 정사각형의 천일 뿐인데 모든 여자 아이들은 그 네모난 천을 몸에 둘러 드레스로 만들고 머리에 둘러써서 공주님 모습을 재현해낸다. 남자 아이들은 하나같이 어깨에 둘러 망토로 만든다. 모두 다 공주 분장을 하고 즐겁게 놀던 중에 자의식이 깨인 일곱 살 아이가 말한다. 

“한 나라에 공주는 한 명 뿐이야. 그런데 우리는 다 공주니까 말이 안 돼. 누가 공주 할래?” 

즐겁던 분위기는 갑자기 심각해졌다. 그때 한 아이가

“내가 공주 할게. 너는 하녀 해.” 

했다. 하녀로 지목된 아이가

“나도 공주할거야.”

한 아이의 문제제기에 잠깐 심각하던 아이들은 공주의 역할을 지키겠다는 용감한 아이의 말에 모두 다

“나도. 나도.”

하면서 자신의 공주 됨을 잃고 싶지 않아했다.

처음에 의견을 냈던 아이는 

“안 돼. 모두가 공주가 되면 다른 건 누가해?”

하면서 당황했다. 그 때 반짝이는 한 아이가 말했다.

“그럼 나는 이웃나라 공주 할게. 그럼 되지?”

그러자 모두 

“나도 다른 나라 공주 할게.”

그렇게 해서 모든 아이들은 각각 자기 나라의 공주가 되었고, 이웃 나라 공주들과 사이좋게 잘 지냈다는 이야기다.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만났던 시간을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반짝인다. 잠깐만 안보면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는 작고 연약한 아이들과 그 아이들이 좋아하는 무당벌레, 콩벌레, 지렁이 같은 작은 생명체들, 씨앗과 꽃, 돌과 풀과 나무 열매, 그 모든 것을 돌보는 햇살과 바람, 비가오고 바람이 불어도 언제나 산책을 좋아하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아이들, 그 아이들을 지켜주었던 천사와 이야기를 가지고 오는 요정, 보석을 나르는 난쟁이와 말 안 듣는 아이를 데리러 오는 도깨비와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나는 마녀, 우리들이 좋아하는 빵과 사과와 케이크. 무지개, 무지개, 무지개…

 촛불을 켜고 끄는 것으로 하루를 열고 닫을 때, 선생님은 오늘 촛불 끄는 아이를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 만약에라도 선생님이 실수로 순서를 어기는 일이 생기면 이건 큰 사고다. 아이들은 누구나 촛불 끄는 것을 좋아했고, 매일 자신이 끄고 싶지만 기다리면 곧 촛불 끄는 날이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는 다른 친구가 끄는 기쁨을 바라본다. 그런데 선생님이 실수로 그 기회를 놓치게 한다면 큰 문제가 된다. 힘이 있는 아이들은 실수가 생긴 즉각 “오늘 제 차례인데요?” 

 하고 말하거나, 똘똘한 일곱 살은 자기 차례가 아닌 날, 다른 동생들의 차례도 기억해뒀다가 선생님의 실수를 지적하고 동생들의 권리를 찾아주곤 했다. 자신이 촛불 끄는 날임을 기대하고 왔는데 선생님이 다른 친구를 지목하고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때, 힘이 없는 아이는 선생님께 말하지 못하고 집에 가서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뒤늦게 수습을 하느라 허둥 되는 일도 있었다. 초보 교사일 때는 그게 뭐라고 그렇게 까지 할까? 이해가 안 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은 어떤 활동을 통해 무언가 배우는 것 보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촛불을 끄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고의 축제인 생일날이 되면 시작하는 시간부터 마치는 시간 까지 모든 것은 생일 맞은 아이를 위해 존재했다. 생일 아이는 유치원에 들어올 때부터 기세가 등등하다. ‘오늘은 내  생일이고, 내가 주인공이다.‘ 라는 당당함이 온몸에서 빛나는 아우라를 뿜는다.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너희들이 나를 위해서 노래해야 해.”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당연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주인됨을 알고 친구들에게 요구한다.

아이들은 거기에 대한 아무런 이의도 없이 당연한 의무로 받아들이고 생일 아이를 위해 노래하고 춤추고, 놀잇감을 양보하면서 더없이 사이좋은 하루를 보낸다. 

 생일 케잌 만드는데 하이라이트인 달걀 깨뜨리기도 생일 아이가 하고, 촛불 끄기는 물론이고 각 활동마다 주인공이 되어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모든 아이들은 황금 왕관과 망토를 걸치고 행진을 하며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축하를 받는 순간을 기다리고, 그 좋아하는 촛불을 자기 나이만큼 많이 켤 수 있는 영광이 베풀어지기를 기다린다. 집안이 부자이든 가난하든 성격이 활발하든 얌전하든 남자아이든 여자아이든 모든 아이들은 자신이 공주가 되고 왕자가 되고 왕이 되기 위해서 유치원에 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잘 익은 복숭아처럼 둥글고 발간 복스러운 아이들에게 최고의 축제인 생일과 마지막 인사는 늘 ‘빛과 소금’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이 힘든 일이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아볼 때 모든 시름이 흩날리는 눈꽃처럼 사라지고 그토록 눈부시게 반짝이는 것만 남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는 그것을 빛과 소금에서 찾는다.

 작고 연약한 아이들과 그들의 배경이 되어준 모든 것들은 그들과 같이 작고 연약한 것들이었다. 나의 수고를 드러내지 않는 그 작고 연약하고 조용한 생명들은 살아있고 흐르고 변화하고 반짝인다. 




 촛불은 자신의 중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는 심지에 의지하여 하늘로 향한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지만 다시 중심을 잡고 바르게 선다. 촛불은 스스로를 태워 자신을 따뜻하게 하고 주위를 밝힌다. 책을 읽거나 기도를 하려는 사람들, 축하하고 기념하고, 사랑하고 애도하는 사람들이 촛불을 켠다. 사람들은 촛불에서 지혜와 소원과 온기를 느낀다. 자신을 느끼고 신을 느낀다. 촛불을 통해 마음이 오고 간다. 

 촛불을 끄면 한줄기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면서 화려한 나선형 무늬를 만들어내다가 더 높은 곳에서 사라진다. 아이들은 자신이 오늘의 아이가 되어 촛불을 끄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촛불을 끄고 나서 생기는 연기는 모든 아이들이 다 같이 좋아했다. 매일 보는 연기인데도 아이들은 매번 

“우와! 저기 봐. ” 

“올라간다. 동그랗다.”

“예쁘다. 신기해!”

 소리를 지르며 환호한다. 

 불을 끄는 순간 촛불은 사라지면서 사람들의 기도를 연기에게 전달한다. 촛불의 부탁을 받은 연기는 사람들의 소원을 가지고 하늘나라로 간다.

  ‘사람은 살균된 세계 속에서는 행복할 수 없는 법이지요. 그 세계에 생명을 이끌어 들이기 위해서는 미생물들을 들끓게 해야 했습니다.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시를 발견해야 했던 거지요.’

 상상력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완전히 행복하지 못한 불만족의 이유를 ‘살균된 세계’를 상기하는데서 찾는다. 이미지를 만드는 근본적인 힘을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이다. 


 촛불을 타오르게 하는 성냥의 주성분은 황이다. 고대로부터 알려진 원자번호 16번인 황은 짙은 노랑으로 우리 몸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순수한 황은 냄새가 없고 독성도 아주 작지만 많은 황 화합물은 심한 냄새가 나고 일부는 독성이 강하다.

 인체의 피부나 머리카락, 손톱, 발톱 등 우리 몸을 구성하고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황은 모든 생명체에게 필수적인 원소이다. 단백질의 섭취로 황을 보충할 수 있다. 자연에서 원소 상태로 발견되는 몇 안 되는 원소 중 하나로, 주로 화산 근처에서 발견된다. 황의 끓는점은 무려 444.7℃. 지옥을 ‘유황으로 된 끓는 연못’이라고 묘사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 뜨거움을 상상할 수 있다.




  소금은 음식에 간을 맞출 때 없어서는 안 되는 기본적인 식재료로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음식의 맛을 낼 수가 없다. 지금은 흔한 물질이지만 옛날에는 구하기가 힘들어서 오래전 이란에서는 월급 대신으로 소금을 주기도 했다. 마태복음에 소금의 비유가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각자 주어진 ‘소금의 맛’이 있고 그 맛을 잃을 수도 있다. 맛을 잃어 필요한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쓸 데가 없어 버려져 밟힐 뿐이라고 경고한다.

 소금의 주성분은 염화나트륨이다. 염화나트륨은 체내로 들어가는 혈액의 삽투압을 조절하고 근육이나 신경의 흥분을 진정시키는 작용을 한다. 

적당량의 소금은 식욕을 증진시키고 변비를 낫게 하는 효과가 있다. 목이 부었거나 아플 때, 치약 대용으로, 찜질용으로, 상처를 씻어내는데 사용하면 소염, 살균의 효과로 세균감염을 막고 염증도 가라앉는다. 

 소금의 희고 썩지 않는 성질은 세상이 부패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정화하는 정의를 상징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드넓은 바다는 작디 작은 소금으로 유지된다. 소금이 없으면 바다 속의 많은 생물들은 생명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형상이 녹아 없어짐으로써 세상에 꼭 필요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크고 넓은 바닷물이 빠져나가면 그 자리에 소금이 남는다. 소금 결정은 작지만 결코 작지 않다. 넓은 바다의 모든 이야기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황과 소금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물질이고 공기처럼 일상생활 곳곳에 존재한다. 적당한 양을 균형 있게 잘 사용하면 유용하지만 부족하거나 지나치면 질병과 재난을 가져온다.  

 빛과 소금은 그 자체로는 크게 드러나지 않는 작은 것이지만 없으면 안 되는 유용한 물질이다. 일상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화학작용을 통해 모든 것들을 살리고 밝히고 따뜻하게 하고 정화시킨다.

 빛과 소금은 아주 작고 미미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없이는 살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과해도 화를 부를 수 있고, 부족해도 불편하고 위험해진다. 적재적소에 적당하게 있음으로서만이 존재 가치를 발한다.

 세상에 꼭 필요한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동안 그토록 수없이 질문했던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바꾸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 대신에 ‘하느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어떻게 죽으셨나?’, ‘예수님은 어떻게 사셨나?’를 묻게 되었다.

 ‘나는 누구인가?‘를 멈추고, ’하느님이 누구신가?‘를 물을 때, 세상에 꼭 필요한 ‘빛과 소금’이 되는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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