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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일상적 삶에 대한 긍정

 

 찰스 테일러『자아의 원천들』3부. <일상적 삶에 대한 긍정>을 요약한 것이다.

 이런 말씀을 발견할 때 마다 불평 불만이 거두어지고, 회개하고 동의하고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살아났다. 어둠에서 빛으로,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청소를 할 때에도 세상의 혼돈을 바로 잡는 하느님의 질서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명을 느끼면서 힘이 솟았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 세상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는 신성한 기쁨을 느꼈다. 

 찰스 테일러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워진 이는 정신적이며, 믿음 속에서 솟아난 그의 모든 노동은 아무리 조악해보여도 정신적인 것이다.‘라는 말을 통해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의 물리적 기준을 무너뜨린다. 중요한 것은 ’새로워진 이‘가 되는 것이다. 


 오직 즐김으로써만 어떤 정신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세상 만물에 초연하면서도 그것을 즐겨야 한다.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잠자고 휴양하는”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세상을 인식함으로써 그대가 세상을 무시할 수 있도록 애쓰라.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는 세상을 사랑해야 하지만 또 다른 의미에서는 혐오해야 한다. 이것이 베버가 청교도의 “현세적 금욕주의”라고 칭한 것의 핵심이다. 죄의 결과로 사물에 매몰되는 것에 대한 답은 금욕이 아니라 모종의 사용이며, 그것은 세속적 사물에 초연한 태도를 취하면서 신에게 집중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관심을 가지면서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인데, 이러한 역설적 성격은 우리가 세상의 만물을 “애착에서 벗어난 애정‘을 갖고 이용해야 한다는 청교도적 관점에서 나온다. 세상 만물을 이용하라. ”그러나 그것에 몰입하지 말고, 그것에서 떨어져 나와, 마치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


 애착을 초월한 애정을 갖고 세상을 이용하는 것이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일상적 삶은 신성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신성화는 가톨릭 전통의 방식으로, 즉 일상적 삶을 교회의 신성한 삶과 연결시킨다고 해서 일어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이런 생활 자체 속에서 일어나며, 진지하면서도 초연한 방식으로 체험되어야 한다.


 활기차고 신성한 모든 기독교인에게는 또 하나의, 기묘하게 섞인 덕의 혼합물이 있다. 그것은 세속적인 일에서의 근면과 세상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다. 그것은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풀 수 없는 미스터리다. 빠르든 늦든 무언가를 하기 위해 모든 기회를 이용하고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는 것. 어느 곳이든 가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자신의 소명 속에서 가장 근면하게 행해야 할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무심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비록 자신의 소명에 가장 근면하게 애쓸지라도 이런 것들에 마음을 기울이지는 말아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청교도적 소명 개념이 얼마나 진지한 것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는 보편적 소명과 더불어 모든 사람에게는 특별한 소명, 하느님이 요구하는 특정한 형태의 노동이 있다. 가톨릭 문화에서 ‘소명’이라는 표현은 사제나 수도사적 삶과 관련해 발생한 반면 청교도들은 가장 미천한 일도 인류에게 유용하고 신에게 이용되기 위한 것이라면 소명으로 생각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소명은 사회적 위계에서 차지하는 지위나 인간 능력의 위계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상관없이 동등하다.

 우리 소명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러한 소명 속에서 주 그리스도를 섬긴다. 당신의 노동이 비록 비천할지라도 그러한 노동을 통해 주님을 섬기는 것은 비천하지 않다. 어떤 일을 하던 하느님이 지정한 곳에서 하느님이 할당한 노동 속에서 가장 양심적이고 본분에 충실한 마음과 정신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하인들이다.




 비록 밭을 갈거나 땅을 파는 일처럼 정직한 소명 속에서 행하는 극히 간단한 봉사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명령을 의식하고 그것에 복종하는 가운데 행해진 것이라면 충분한 보상의 영예를 부여받는다. 반면 최선의 노동(설교나 기도, 복음주의적 희생 행위)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명령과 명예를 존중하지 않고 행해진다면 저주받게 된다. 

 하느님은 우리가 하는 일 자체보다는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신다. 얼마나 좋으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하느냐에 관심을 가지신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중요한 문제일 때 이 노동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워진 이는 정신적이며, 믿음 속에서 솟아난 그의 모든 노동은 아무리 조악해보여도 정신적인 것이다.

 하느님의 법 안에서 무엇이 행해지던 비록 신발을 닦는 것과 같이 몸으로 수행된 것이라도 할지라도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미천하더라도 그것은 신성하다.


 최고의 삶은 더 이상 고귀한 행위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삶을 영위하든, 심지어 극히 세속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삶이 따르고 있는 정신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이제 모든 직업의 노동이 성스럽게 수행되고, 신의와 복종 속에서 이루어지며 하느님의 영광에 현저하게 기여한다면 어떤 직업도 결코 미천하지 않다. 직업이 하찮다고 해도 결코 노동의 가치로움을 깎아 내리지는 못한다. 하느님이 보시는 것은 노동의 탁월함이 아니라 노동자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양을 돌보는 양치기가 제 일을 내가 말한 바대로 행한다면 하느님의 관점에서는 판결문을 읽는 법관의 행위나 통치하는 관리나 설교하는 목사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가치 있는 노동이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은 우리들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정신이다.

 그런 선물이 부과하는 의무는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목적은 우리 소명에 맞는 일을 하면서 인간들에게 봉사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인간은 고유한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지정된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하느님의 의도에 봉사한다.




 하느님과 융합된 인간은 혼란된 질서를 고치고 그것을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다시 바로잡아야 할 불가피한 필요성을 느낀다.

 이런 방향에서 일어나는 욕구와 노력은 오직 내면에서 작동하는 하느님의 화해 행위의 결실일 뿐이다. 그런 욕구와 노력은 갱생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는 진정 그러한 갱생에서 정당하게 야기된 것이다.

 갱생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죄악으로 가득차고 무질서한 세계에서 신에게 가해진 모욕에 경악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의 최우선적 목표 중의 하나는 이런 무질서를 바로잡고, 인간들이 망쳐놓은 것들을 정화하거나 적어도 신에게 지속적으로 가해진 끔찍한 모독을 경감시키는 일일 것이다.

 목표는 끊임없이 무질서와 싸우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우선 개인적 규율,
곧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고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개인이다.

 다음으로 그러한 사람들에 기초한 사회 질서가 요구된다.

 이것이 소명을 둘러싸고 지속적인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핵심적인 추가적인 이유를 제공해준다. 이런 식으로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안정된 궤도” 위에서 활동한다.

 그들은 서로 신뢰할 수 있다. 

 그들은 안정적인 사회질서의 근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게다가 그런 개인들에 의해 형성된 사회질서는 점점 더 계약에 정당하게 의거한 것으로 간주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적 헌신에 의거한 규율을 받아들이고, 동일한 방식으로 삶의 행로를 선택한 사람들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적 삶 속에서 스스로를 규제하는 사람들의 질서이다. 자유롭게 동의한 계약은 점점 더 그런 사람들을 이어주는 유일하게 정당한 결속으로 간주된다.


 하느님을 공경하는 규율적인 사람들은 합의를 통해 서로를 규제해야 한다. 반면 갱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필요하다면 강제적으로 규제해야 한다. 교회의 온당한 규율은 “하느님이 교회에 하사한 규율이었고, 그를 통해 사람들은 서로 가르치고 꾸짖음으로써 또 제 멋대로인 사람들과 법을 경멸하는 자들을 모두 징계하고 처벌함으로써 자신들의 의지와 행위를 하느님의 법에 따라 형성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성자들은 스스로를 통제하고, 서로 나무란다.

반면 불경한 자들은 강제적으로 규제한다.


 스스로를 하느님의 법에 의거한 집단과 동일시하는 것은
엄청난 힘의 원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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