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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앵두낙엽버섯의 관조

 

 우연히 앵두낙엽버섯을 알게 되었다.

담홍색의 손톱만한 갓이 실같이 가느다란 버섯대 위에 모자처럼 씌워져 올망졸망 피어있는 모습에 눈길이 머물렀다. 머리 위에 올려 진 이슬방울 하나도 무겁게 보일만큼 작은 버섯이 바람에도 꺾이지 않고 흔들림 없이 서있는 것이 대견하다. 방사형으로 홈이 파인 스트라이프 무늬에 가장자리는 물결모양으로 마감 처리되어 있는 짙은 핑크빛 버섯 모양이 꼭 요정 치마 같다. 

 앵두낙엽버섯은 독은 없지만 조직이 종이처럼 얇고 질겨서 먹지는 못하는 비식용이라고 한다.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활엽수와 침엽수가 혼합되어있는 숲의 낙엽 위나 지상에 흔히 나고 나무 표면이나 식물체에 나기도 한단다. 먹지도 못하고 예쁘기만 한 이 버섯은 가만히 서 있으면서 낙엽층을 분해하여 생태계를 유지하는데 일조하는 숲속의 청소부라고 한다. 


 최근에 한 여배우가 유명을 달리한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다. 고운 외모에 차분하게 감정을 잘 전달하는 중견배우로 화려한 스타는 아니지만 누구든 알고 특별히 미워할 이유가 없는 참한 사람이었다. 우울증을 앓았던 모양이고 ‘나 하나쯤 사라져도 세상은 잘 돌아갈 것 같다.’는 말을 했다는 후문이 있었다. 아름다웠던 고인의 명복을 빌며….

 감정이 가라앉고 우울할 때 한번쯤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 하나쯤 없어도 세상은 잘 돌아갈 것이라든가, 내가 하지 않아도 세상에 좋은 작품은 넘쳐나는데 굳이 나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와 같은, 세상과 내가 분리된 생각 말이다. 사람들 속에서 재능을 펼치고 인정을 받으며 존재감이 빛을 발하는 인생도 좋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약화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다. 

 카르마라는 게 있다. 불교에서는 업식, 그리스도교에서는 죄, 심리학에서는 프로그램, 그림자, 컴퓨터에서는 바이러스, 의학에서는 질병이나 암으로 말해지는, 종교나 학문에 따라서 조금씩 다른 용어와 배경을 가지고 설명되지만, 대체적으로 원인에 따른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우주의 부정적인 측면이다. 극복하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 되는 것도 카르마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사정이 있다. 나 역시 그 사정 때문에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부끄러울 일도 아니게 이혼을 했다. 그리고 너무나 소중한 아이와 3년간 만나지 못하고 지낸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생각하면 아이가 무슨 대학을 간다든가, 성적이 어떻다든가 하는 고민은 전혀 할 수가 없다. 그저 가방 메고 왔다 갔다 하는 것만도 예쁘다.

 ‘꽃길만 걷자.’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란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불행한 일을 겪지 않기를 바라고 저마다의 최선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성장은 자신이 원하는 꽃길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하지 않는 일을 겪을 때 그 일을 받아들이는 방식, 태도, 자세, 관점이 성장의 동력이다. 그것이 믿음이고, 구원의 열쇠고 깨달음이다. 내 노력과 애씀에 대한 결과에 실망하고 불평, 불만이 시작될 때 공허와 무력감, 우울과 어둠에 잠식당한다. 최선의 선택과 노력의 결과에 대해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책임질 때, 회개하고 동의하고 감사할 때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새로운 시작은 하느님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


 1cm 짜리 먹지도 못하는 앵두낙엽버섯이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그토록 영롱하게 아름다운 것처럼,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지 못 한다 해도, 삶이 뜻대로 되지 않고 행복하지 않다 해도, 버림받고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로 가득 찬 삶의 한 가운데에 있다하더라도,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 견뎌야하는 삶일지라도,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살아야할 이유는 충분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행복할 일이 있어야 행복하고 그럴 일이 없으면 불행해진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런 허약한 삶의 기준으로 스스로의 존엄을 짓밟아서 되겠는가.

 이 말을 하기 위해 헐떡이며 여기까지 달려왔다면 과장인 것 같지만, 나에게는 진실이다. 하느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전령의 소명을 나는 그렇게 이해하고 이 글을 쓴다. 살아있는 것 자체의 기쁨을 아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우리 모습이다.  

‘나는 누구인가?’를 수없이 부르짖던 나,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그토록 고민했던 나는 이제 그 질문과 고민을 하지 않는다. 아니, 질문은 바뀌었다.

‘하느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어떻게 죽으셨나?“, ’예수님을 닮기 위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은 말한다.

 “꽃, 암소는 철학자보다 훨씬 더 관조합니다. 그리고 관조하면서 자기 자신을 채우고 자신을 향유하는 것입니다(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꽃과 암소는 무엇을 관조할까요? 자기 자신의 요건을 관조하는 것입니다. 돌은 규소와 석회질을 관조하고, 암소는 탄소와 질소와 소금을 관조하는 셈입니다. 이것이 self-enjoyment(자기-향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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