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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용서를 가르쳐 주신 분

  

“그토록 죽을 듯이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내가 왜 이렇게 모든 것을 잃어야만 하며, 왜 몸이 아파야만 하며, 왜 이런 낯선 곳에 와 있어야만 하는가? 왜? 왜? 왜”

 4년간의 상담은 지금 스스로의 모습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질문들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작업이었다. 아무리 심하게 엉켰어도 계속 처박아두거나 가위로 싹뚝 잘라버릴 수 없는, 인내심을 가지고 풀고 또 풀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 엉킨 실타래는 하나뿐인 소중한 내 인생이기 때문에.

 상담을 하면서 점점 더 깊이, 아프게 돌아본 내 인생은 겉보기는 행복해 보였지만 온통 돌려막기 식이었고, 행복해 보이는 괴로움의 근본 문제를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의 엄정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초기의 한 잊지 못할 상담이었다. 

 선생님께서 내가 오랫동안 너무나 미워했던 사람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나는 OOO를 용서한다.”

 를 다섯 번 외치라고 하셨다.

 집단 상담할 때부터 나는 상담을 같이 받았던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저항이 적은 편이었고 적극적으로 내가 느끼는 문제를 숨기지 않고 말하는 입장이었는데, 그 날,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말이 목구멍에서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심지어 선생님을 바로 쳐다볼 수도 없어서 시선을 피하면서 말을 뱉어내려고 무지 애를 썼다. 마치 목구멍에 무슨 종잇조각이 가로막혀 있는 것처럼 말이 안 나왔고, 나는 힘을 내서 그 말을 입 밖으로 내 뱉았다. 먹어서는 안 될 가시 같은 것을 삼켰다가 억지로라도 뱉아내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것 같은 절박함으로 힘을 내서,

 “나는 OOO를 용서한다.”

 “나는 OOO를 용서한다.”

 “나는 OOO를 용서한다.”

 “나는 OOO를 용서한다.”

 “나는 OOO를 용서한다.”

 다섯 번의 용서는 50번을 하는 것만큼 길게 느껴졌고, 그 힘든 용서를 마치자마자 나는 알 수 없는 격정적인 눈물이 쏟아져서 통곡을 했다. 부끄러운 것도 없었고 어떤 말로 설명하기도 힘들게 통제력을 상실한 채로 한참을 울었다. 엉엉 소리를 내면서 아이처럼.

 선생님께서는

 “그래, 울어라. 울어. 얼마나 힘들었으면……”

 하고 같이 아파해주셨다.

 긴 통곡이 끝나고 긴 장마가 끝나고 햇빛이 비치는 것처럼 이상하리만치 상쾌했다. 그 때 선생님께서 해주셨던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본인 존재가 나왔어.”

 나는 그 때 그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잘했다는 지지의 표현인 것만은 틀림없었고, 5년이 지난 지금, 또 앞으로도 나는 ‘나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살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은 용서에 대해 가르쳐 주셨다.

 “용서는 누군가의 죄를 내가 용서한다는 의미가 아니야.

 내가 내 어깨 위의 짐을 내려놓는 거야.


 그 날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랜 세월 당나귀 등에 진 무거운 짐처럼 지고 살았던 ‘미움’이라는 짐을 스스로 벗어 던져버리고 가벼워진 마음에 기쁨과 감사가 차올랐다. 저승사자 같았던 선생님이 나를 구하러 하느님이 보내신 천사 같이 여겨졌다.

 고단한 삶의 역정 속에서 사랑으로 착각된 부모님의 사랑은 불안덩어리였고, 그 불안의 투사체였던 나의 인생은 항상 말없이 묵묵히, 참고 견디며, 끝내 해내고 마는 억압적인 투지형으로 형성되었다. 그 과정에서 모감정의 중간대상으로 등장하는 학교선배나 교수, 직장상사 등을 미워하면서도 나의 생존을 위해 의존하는 양가감정을 키우면서 신경증이 깊어진 것이었다. 

 상담을 통해서 이 무서운 감정의 악순환을 알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 환상을 깨우치지 못했더라면 나는 지금도, 언제까지고 누군가에게 인정받기위해 최선을 다하며 힘겨운 삶을 살았으리라. 한 사람의 삶에 대한 비밀을 함께 나누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소진되는 에너지를 오직 나의 성장에 투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상담선생님으로부터 사람에 대한 경외심과 삶에 대한 아름다움을 배웠다.


 딸, 주희가 학교에서 자기 반 전체가 선배들한테 찍혔다면서 무서운 선배들의 만행에 대해 흥분하면서 말하곤 한다. 또 한 명의 주희의 적은 할아버지인데, 할아버지가 공부를 가르치면서 잘 못하면 뺨을 꼬집거나 허벅지를 때리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는 등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빨리 돌아가셨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증오심에 가득 차 있다. 주희는 지금 중 2다. 김정은이 못 쳐들어오는 이유가 한국의 중2 때문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을 정도로 무서운 질풍노도의 시기인 주희에게 용서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무 이유 없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 없을 때, 무술을 배워서 복수를 한다면 속이 시원할까? 똑같은 범죄 영화를 보고 어떤 사람은 그런 범죄를 공부하는 법학자가 되거나 그런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되고, 어떤 사람은 모방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가 되었다면 그건 어떤 차이일까? 같은 물을 마시고 소는 우유를 만들어내고 뱀은 독을 만들어 내는 건 왜일까?”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열정적으로 말을 하고 있는데 주희가 욕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엄마, 사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한동안 욕을 한 적이 있었어. 다른 아이들도 다 욕을 하는데 나만 안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고 나도 욕을 듣고만 있을 수는 없어서 욕을 했는데, 막상 해보니까 안 좋아서 그 다음 부터는 안하기로 했어. 대신에 남이 안 듣는데서는 가끔 하는 것도 필요한 것 같애.”

 힘든 시기를 지내면서 자신이 겪은 욕에 대한 나름의 질서를 스스로 잡아가는 아이가 너무 대견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다 이해한 것 같았다.

 “그래, 잘했어.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지는 못해도 미워하면서 살지는 않는 게 좋아.”

 행복처럼 보이는 괴로움 속에 살았던 우리는 지금, 괴로움처럼 보이는 행복 속에 산다.

나보다 키도 발도 더 커진 딸과 미운 사람을 용서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걷는 상쾌한 밤공기 속에 하느님도 함께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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