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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바다 선생님

 

 누구나 살면서 거역할 수 없는 시기가 있다. 내 의지로 막을 수 없는 일. 

 시간이 약이라는 옛 말처럼 시간이 지나고 보면 모든 일들은 무언가 가르쳐 주기 위해 일어났다는 성숙한 생각을 하게도 되지만, 막상 회오리의 중심부에 있을 때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라 허둥대다가 깊은 우울의 늪에 빠지기도 한다.

 40대 초반, 나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고 내 집에 불이 나서 내가 다쳤는데도 내 상태를 모르고 남의 집 불을 끈다고 뛰어다닐 때였다. 정신없이 닥친 일들을 헤쳐 나가다가 도저히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내 발길이 닿은 곳은 바닷가였다.


 아침 일찍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바닷가에 도착하면 푸른 바다는 언제나 넉넉한 모습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태양은 어김없이 떠오르고 눈부신 태양 빛이 반사된 물결은 그야말로 황금빛 장관을 이루었다. 모래사장 끝에서 끝까지를 사각거리는 모래를 밟으며 맨발로 걸으며 가끔씩 걸음을 멈추고 발을 들어 촉촉한 모래와 발 사이의 공간으로 지나가는 한줄기 바람을 느꼈다. 그리고, 언제 어디에서 서서 바라보아도 태양은 항상 나를 향해 빛나고 있었다.

어릴 때, 달이 나를 따라오는게 하도 신기해서 뛰었다가 멈추어서서 확인하는 놀이를 많이도 했다. 과학적으로 이미 다 설명된 일이지만 내가 아무리 힘차게 달려가서 멈추어서서 보아도 해와 달이 따라와 있는 것은 아직도 참 신기하다. 뛰어봤자 하느님 손바닥 안이라는 것을 이런 느낌으로 느낀다. 


 바다는 쉴 새 없이 호흡하며 조개껍질이며 조약돌을 둥글게 다듬어 지상으로 올려 보내고 있었다. 파도에 깎여 둥글 둥글해진 것, 둥근 것들 사이에 특별히 길쭉한 개성있는 것, 표면이 보송보송한 것, 매끌매끌한 것, 무늬가 없는 단순한 것, 특별한 무늬를 가진 것, 아직 모양과 색깔이 선명하게 살아있는 것, 오랜 시간 마모되어 거의 사라질 정도로 작아진 것, 아침 햇살에 빛나는 조약돌이며 조개껍데기들은 저마다 독특한 색깔과 고유한 무늬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의 관심을 바라지 않고 이름 없이 그저 그렇게 존재하면서도 보석 보다 아름다웠다. 

 ‘나는 어떤 고유한 빛깔의 사람일까?’

 혼돈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내면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바다는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무언가 비밀을 알려주려는 것처럼 그렇게 조개껍데기를 선물로 보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시에 나는 시쳇말로 망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그 일을 돌이켜보면 딱히 망한 것도 아니었고,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내가 이 보다 더 옳을 수는 없다고 굳건히 믿었던 신념이 무너지고 젖 먹던 힘까지 내어서 추진했던 일이 내 뜻과 다르게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했다거나 망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인생에서 어떤 일이 내 의지와 달리 부인되는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을 통해 내가 배울 수 있는가가 중요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 일은 또 하나의 나만의 오답 노트가 되어 다음으로 건너가는 훌륭한 밑천이 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진실이 있고, 자신만의 삶의 역정, 삶의 어려움에서 배운 교훈과 지혜를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게 믿고 밀고 나간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흘러온 것처럼 들어선 바닷가를 걷고 나서 버스를 타고 돌아올 때면 하루 계획이 절로 떠올랐다. 신기한 일이었다. 바다는 그렇게 말없이, 지혜롭게, 힘 있게, 맑고 차분한 생명력을 전달해 주었다. 한 달 가량, 나는 매일 아침 스승을 찾아가는 마음으로 바다를 찾았고, 바다는 하루 하루 내가 건강을 찾아가도록 도와주었다. 지금도 심신이 지칠 때면 가끔씩 바닷가에 간다. 바다는 늘 찾아오는 모든 사람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넉넉하게 안아주고 있다. 


 루돌프 슈타이너는 그의 저서, 『색채의 비밀』에서 ‘파랑에는 신이 산다’ 라고 했다. 어떤 깊은 뜻인지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나의 이런 경험에 기대어 신이 거하는 색이 있다면 아마도 파랑일거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파랑은 하늘과 바다, 세상을 이루는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색이다. 또 하나의 넓은 공간을 차지하는 숲은 파랑에 노랑이 섞인 초록이다. 하늘과 바다와 숲이 노랑이나 빨강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들뜨고 불안해져 견딜 수 없지 않을까? 

 내 마음도 파랑과 초록이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빨강, 노랑은 꼭 있어야 할 곳에서 힘과 역할을 발휘할 때 만족스러워진다. 빨강과 노랑, 주황과 같은 화려하고 강렬한 색깔이 파랑과 초록을 휘저으면 마음의 균형이 깨진다. 모든 자연이 정해진 고유의 색과 적절한 면적과 온도가 있듯이 우리의 마음도 그런 적절한 이치에 따른 균형을 회복할 때 평정심에 이를 수 있다.


 넓고 푸른 바다에는 해맑은 아이들과 외로운 노인들, 상처 입은 젊은이들, 사랑하는 연인들……. 

 강하고 약한 모든 생명들을 사랑으로 안아주시는, 거룩한 파랑의 신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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