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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4. 2019

체셔 고양이와 갈림길

 

 나는 손으로 정말 많은 일을 해왔다. 기억이 나는 한에서의 어릴 때부터 하루 종일 그림을 그렸다. 내 몸 보다 더 큰 종이 위에 엎드려서 가장자리를 돌아가며 그림을 그렸다. 

 20대에는 미술학원 강사, 도예, 목공예 공방 운영, 웹디자인 등 전공인 미술 관련 일들을 했다. 4B 연필과 붓, 흙, 나무, 마우스… 영역이 달라질 때 마다 다른 것을 잡았지만 손의 활약은 계속 되었다. 

 30대에는 발도르프 교사 교육을 받고 유치원 교사로 일했다. 아이들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였고, 아이들에게 최대한의 욕구를 허용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교육 철학에 의거하여 잠시도 쉴 틈 없이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40대에는 정신분석을 받으면서 식당 보조나 청소, 호텔 메이드 등의 허드렛일을 했다.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의 핵심은 잠시도 쉬지 않고 땀을 흘리며 온몸으로 일을 해왔다는 것이다. 게으르기 보다는 부지런했고, 도움을 받기 보다는 도움을 주는 입장이었다. 이 보다 더 할 수는 없다 싶을 만큼 종횡무진 손의 활약을 단숨에 멈추게 한 손목 절단 처형은 일생일대의 사건으로 다가왔다.

‘나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하루하루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것 이상 뭐가 있단 말인가?’ 손의 항변이었다.

 사후 세계에 대한 꿈을 오랜 시간 동안 사유하면서 얻게 된 교훈은 바로 ‘부활의 신비’와 ‘거짓이 없는 완전한 육체의 형태가 보존되어야 한다’ 는 것이다. 

 감옥 같이 여겨지는 곳에서 ‘내가 왜 여기에 와 있지?’, ‘나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이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라고 외칠 때에도, 사실은 그 모든 선택도 책임도 나의 몫이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한 장면이다. 엘리스가 갈림길에서 채셔 고양이에게 묻는다. 

“내가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말해 줄래?”

“어디로 가는데?”

“몰라.”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데도 갈 수 없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에 달려 있지.”

“어디든 별로 상관없는데......”

“그렇다면 어느 쪽으로 가든 무슨 문제가 되겠어.”

“내가 어딘가에 도착할 수만 있다면야......”

“넌 틀림없이 어딘가에 도착하게 돼 있어. 걸을만치 걸으면 말이지.”

 뜨거운 태양아래, 거친 비바람 속에서 ‘온 몸으로’ 걸을만치 걸어서 도착한 곳에서 어리둥절 하다면, 어디든 상관없다던 자신의 생각 때문이다. 걸을만치 걸으면 어딘가에 도착하게 돼 있다. 틀림없이. 거기가 마음에 들든 아니든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 아무데나 도착해도 된다면 어디로든 가도 되지만 자신이 원하는 곳에 도착하려면 자신이 원하는 바가 분명해야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집중하고 의도하는 것에 의해 인도된다.

 지금, 내가 원하지 않는 곳에 와 있다면 그건 내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거나, 어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목적 없음, 낮은 자존감, 책임을 회피하는 세상에의 의존이 그 원함 없는 나약한 존재를 아무데나 데려다 놓은 것이었다.

 카르마는 원인에 따른 결과이다. 나를 둘러싼 주변 환경은 모두 내가 창조한 결과물이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내가 창조한 것이다. 이해할 수 없었던 그 진실을 명확하게 이해할 때 까지 수업은 계속 되었다. 


‘오, 아담이여, 나는 너에게 대자연 속에서 일정한 자리도,

고유한 면모도, 특정한 임무도 부여하지 않았노라!

어느 자리를 차지하고 어느 면모를 취하고 어느 임무를 맡을지는

너의 희망대로, 너의 의사대로 취하고 소유하라!

너는 그 어떤 장벽으로도 규제받지 않는 만큼 너의 자유의지에 

따라서 네 본성을 테두리 짓도록 하여라.

나는 너를 천상존재로도 지상존재로도 만들지 않았고,

사멸할 자로도 불멸할 자로도 만들지 않았으니,

이는 자의적으로 또 명예롭게 네가 네 자신의 조형자요,

조각가로서 네가 원하는 대로 형상을 빚어내게 하기 위함이다.‘


 15세기 학자 ‘피코델라 미란돌라‘ 는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에서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하시는 말씀의 형식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하고 있다. 

‘피코델라 미란돌라’의 하느님은 스스로 원하는 자발성으로 자신이 만들고 싶은 이미지를 만들어가라는 ‘창조의 하느님’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을 빚어내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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