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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Aug 02. 2019

북아트 수업 후기


 '여름휴가로 쉽니다'가 가장 많이 붙는 7월 말 이틀 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장 더운 대구 접경 지역 경산 한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독서교실이라는 제목으로 북아트 수업을 했다.
 3, 4학년으로 구성된 스무 명의 아이들을 만났고, 이런 시간은 내 삶에서 수년만에 주어진 시간이라 그야말로 모든 것이 새롭고 특별하게 와닿았다.
오랜 시간 금식하던 사람이 진수성찬을 먹게 된 듯한 기분이랄까...
 어느 집단이든 늘 있게 마련인 떠들고 말썽 부리는 두서너 명의 남자아이들 까지도 너무 이뻐서 손을 꼭 잡아주었다.

 처음엔 선생님이 어떤 사람인지 눈치를 본다. 

 각자 자기들 입장에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판단해서 자신의 적절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다.
 첫 시간은 끊임없이 
 "이거 해도 돼요?", "이렇게 해도 돼요?"
 돼요? 안돼요? 질문의 홍수다.
 모르는 사람과의 관계 맺기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허용받거나 제제가 있는 지점의 경계를 점검하는 것이다.
 허용이 많을수록 유연해지고 친근해지고 규제가 많을수록 눈치를 보고 경직된다.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허용이 많은 선생님은 좋은 사람, 규제가 많은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된다.
 교사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운영할 수 있는 선에서 그 범위를 결정해야 한다.


 초보 교사의 어려움이나 실수는 교과를 가르치는 것보다 이 경계를 설정하는데서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상적인 상이 강한 교사일 경우 아이들이 더 자유롭고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허용을 함으로써 자유와 즐거움의 경계를 넘어 혼돈으로 치닫게 된다.
 그렇게 되면 다음번에는 보다 강력한 경계를 설정해서 '안돼!'나 규율과 설명이 많아진다.
 혼돈에 대한 두려움이 부자유한 경직된 질서를 만들어낸다.
 이 허용과 규제 사이를 오가면서 혼돈과 질서의 진폭을 줄여나가는 것이 초보 교사에서 보다 유능한 교사가 되어가는 시간이다.


 오랜만에 아이들을 만난 기쁨으로 허용적인 교실 분위기를 만들었을 때, 마지막 날인 둘째 날 아이들은 첫날보다 큰 보폭으로 훅 들어왔다.
 내가 손을 꼭 잡아주고 어깨를 주물러주었던 말썽쟁이 남자아이들은 달라와서 폭 안기기까지 했다. 
 '나는 안 해야지.' 주어진 지시를 따르지 않는 부정적인 말을 하면서 선생님의 반응을 살피며 눈치를 심하게 보던 덩치가 큰 남자아이는 '이제 뭐해요.' 하면서 치근덕거린다.
 이틀간의 수업이었지만 가장 아픈 손가락 같았던 한 여자 아이가 있었다. 외모가 너무 예쁜 아이였다.
 목소리도 모기 소리처럼 작고 힘이 없던 아이는 작은 칭찬을 해주자 갑자기 활발하게 달려와서는 '또 할래요.', '또 할래요.' 의욕을 보였다. 처음에 몇 번 허용을 하자 다른 아이들 몇 배의 속도로 금방 금방 해내면서 계속하려고 했고, 쉬는 시간에도 하고 싶다고 했다. 
 "이제 좀 쉬어." 하고 선을 긋자마자 자신의 존재가 거절당했다는 느낌을 받은 듯이 금방 경직되어서는 실망하는 표정을 보였다.


 마지막 시간이 가까워오자 수업이 재미있는 여자 아이들은 다가와서 손을 잡아끌면서
 "이제 재미있는 거 해요. 마지막이잖아요."
 "이틀은 너무 짧아. 더 오래 했으면 좋겠어요."
 하면서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재미있는 게 뭐야?"
 하자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수건 돌리기요!"
 한다. 그래서 남은 한 시간은 갑자기 수건 돌리기를 하게 되었다.
 "선생님이 수건 돌리기 해 본 지 30년이나 지나서 어떻게 하는지 잊어버렸는데 누가 설명해 줄 사람?"
 하니까 "저요! 저요!" 서로 알려주겠다고 아우성이다.
 그 와중에 한 아이가 
 "30년 전이면 선생님 몇 살이에요?" 
 한다. 내가 "100살이야." 하니까
 "에이, 아니잖아요." 하는 아이들도 있고, 발육이 늦은 작은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얼굴을 자세히 본다.


 "해도 돼요?" 질문의 홍수였던 첫날, 눈치를 심하게 보던 아이들은 금방 경계가 허물어져 땀을 뻘뻘 흘리면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수건 돌리기를 한다.
 벌칙으로 '인디언 밥'을 하는 데 있어 남녀 양성으로 팽팽한 의견이 갈렸다. 남자아이들은 무조건 같이 때려야 한다였고, 여자 아이들은 남자아이들이 너무 세게 때리기 때문에 벌칙은 없이 그냥 진행하지는 것이었다.
 여러 의견이 나오는 가운데 결론은 여자 아이가 걸리면 여자 아이들만 벌칙을 가하고(여자 아이들은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듯이 하면서 서로에 대한 동료애를 보였다), 남자아이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때리고 마지막은 팔꿈치로 일격을 가함으로써 강함을 과시했다.
 나는 (마지막 선물로) 선생님이 술래가 되면 남자아이들도 때려도 된다는 큰 조건을 걸었다.
 게임에서 인기가 없던 나는 곧바로 인기가 급상승했고, 곧 걸렸다.
 내가 인디언 밥 벌칙을 받기 위해 원 가운데에 엎드렸을 때 여자 아이들은 
 "안돼! 살살해!"
 하면서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되는 선생님에 대한 걱정을 했고, 남자아이들은 "와!" 하면서 환호했다.
 강한 타격이 실제로 하나도 아프지 않았고 시원했다.
 인디언 밥 벌칙 속에 나의 달란트로 세상과 만나고 싶었던 욕망과 제제 속에 마음껏 움직이지 못했던 아이들의 욕망이 만나 스파크를 튀기면서 우리 모두 한순간 해방감을 느꼈다.


 심하게 흐트러진 마지막 순간, 아이들이 나가면서 사고라도 날 까봐 계획에 없었던 모으기 활동을 급하게 생각해 냈다.
 오래전에 아이들과 함께 했던 시를 읊으면서 유리드미 동작을 했다.


땅은 두 발아래에 단단하게 있고,
하늘은 내 머리 위에,
친구들은 내 양손에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위에 단단하게 섭니다.


 땀을 흘리며 발갛게 상기된 모습의 나와 스무 명의 아이들은 두 발을 땅 위에 모으고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하나의 원을 만들어서 몇 초간의 정적 속에 서 있었다.
 나는 입구에 서서 한 명 한 명 악수하고 인사하면서 그들과 헤어졌다.
 앞으로 또 이런 시간이 주어질지, 없을지 모르지만 한낮의 불볕더위조차 감사로 충만한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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