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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18. 2019

노숙인의 DNA

 

 오랜 시간, 해운대 바닷가 쪽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많은 노숙인들을 지켜본 바 있다.

당시에 내가 하고 있었던 청소 일에 대한, 또 내 삶에 대한 생각이 많았다. 말하자면 망상이었다. 

출근 시간 전에 바닷가에 와서 머릿속과 마음에 바닷바람으로 채워넣는 것으로 그 시절을 견딜 때였다. 


 이른 아침의 바닷가에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조깅을 하며 새 아침을 활기차게 여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바닷가 벤치에서 밤을 지낸 노숙인들이 의외로 많았다. 그들을 처음 발견했을 때는 해운대가 국제적인 휴양지인데 구청에서 이런 관리도 하지않느냐는 식의 의문과 그들에 대한 싫은 감정이 밀려왔다.

씻지않아서 온몸 전체가 시커멓게 어두워져 있고 주거지가 없어서 자신이 가진 모든 짐을 들고 다니는 사람은 큰 보따리를 가지고 있었다. 여름인데도 두꺼운 패딩을 입고 있었다. 바닷가 쪽에 있었지만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시간대에 잘 드러나지 않는 구석진 벤치에 주로 있었다.


 특히 눈여겨 보아졌던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계절감각에 둔감한 옷차림과 바르게 걷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척추를 곧게 펴지않고 어딘가 구부정하며 좌우로 흔들리고 느렸다.

계절에 맞지않는 두꺼운 옷차림과 바르게 걷지못하는 느린 보행, 타인의 시선을 피해 숨어 있듯이 구석진 어두운 곳에 있는 특징은 태양 아래서 핫팬츠와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바닷가를 가볍게 달리는 사람들과 확연히 비교되는 외적 특징이었다.

노숙인들이 그런 외형에 이르는데는 시간이 있었다. 그 시간을 지낸 생활 습관이 있었다.   


 일반인과 달라보이는 외형을 결정짓는데 작용한 그들의 생활 습관을 생각해보면 이런 식이다.

많이 먹는다. 언제 또 먹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늘 굶주려있다는 불안과 불만족 때문에 적당히 먹지 못하고 음식을 탐욕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잘 안씻는 것, 이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잘 안씻는 습관은 추위와 피부병등 많은 외부 환경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피부자아라는 개념이 있다. 피부는 신체를 둘러싼 거대한 조직으로 세상과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통로이다. 잘 씻지 않고 사람과의 접촉이 없음으로서 무뎌진 감각은 추위와 더위, 활동, 균형감각, 촉각, 생명감각... 모든 감각을 마비시킨다. 

노숙인은 혐오의 대상으로 보기 쉽지만 생활습관의 변화에 따른 질병인 대사증후군에 속하는 일종의 병으로 보였다. 스스로의 의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무기력의 질병.

 

 오랜 시간,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느꼈다. 내가 혐오를 느끼면서 지켜본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들과 같은 벤치에 앉아서 그들을 관찰하고 있는 나, 내 안에 있는 생존에 대한 두려움의 DNA를 발견할 수 있었다.  

 다음은 노숙인에 대한 관찰 시절에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들이다.


 하나는 젊은 남성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렸던'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 화구를 잔뜩 들고는 다녔지만 한번도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얼굴과 머리카락 옷차림, 화구와 많은 짐들이 전체적으로 시커먼 무채색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이 젊은이는 그 외관에서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풍겨나고 있었다. 


 또 한명은 육십 정도의 여성으로 해운대 식당가를 돌아다니면서 음식 쓰레기를 수거해서 끼니를 때우는 듯 했다. 이 사람은 길을 걸어다니면서 늘 중얼중얼 무슨 말을 했다. 괜찮은 음식을 하나 수거했다 싶으면 그걸 먹으면서 싱글벙글 웃으면서 중얼거렸고, 음식을 수거하지 못할 때는 불만에 가득찬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자주 볼 수 없었던 그녀의 웃는 얼굴 속에서 아기 얼굴이 보였다. 그러다가 도저히 참지못할 만큼 화가치밀었는지 멈춰서서 세상을 향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다음은 한 마디도 각색없이 들은 그대로이다.

 "아무거나 던져놓으라고. 내가 개처럼 주워먹을테니까!"  

 끔찍했다. 그녀에게 세상은 자신의 입에 들어갈 수 있는 음식이 눈 앞에 있는 세상과 없는 세상, 두 가지로 분열되어 있었다. 음식이 있으면 행복, 없으면 불행. 그렇게 단순하게 양분된 세상 속에서 웃다가 화내다가를 반복하며 죽어가고 있었다. 프로이트적으로 보면 구강기 수유 경험에서 박탈이 심했기 때문일 것이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가 끝없는 식탐이, 세상에 대한 원망이 되었다. 


 다른 하나는 당시에 내가 일했던 호텔 앞 벤치에 상주하는 여성으로 나중에 알고보니 '빨간 우산'으로 통하는 꽤 유명한 노숙인이었다. 안좋은 모습으로 유명해졌지만 유명해지지 않을 수 없는 행동을 했다.

육십은 족히 되어보이는 할머니인 그녀는 온통 빨간색 옷을 입고 있었고, 비가 오든 안오든 빨간 우산을 켜고 있었다. 외적인 특징으로도 눈여겨 봐 졌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갑자기 내지르는 소리였다. 그녀는 자신을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는 사람에게 깜짝 놀랄만큼 큰 소리를 내질렀다. 그리고는 그 사람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사라질 때 까지 그 사람에게 욕을 퍼부어댔다. 사람들은 그냥 눈길을 주다가 봉변을 당하고는 서둘러 그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녀가 그토록 화가나서 끊임없이 하는 말의 내용을 유심히 들어 보았다. 욕이 섞이고 여러 가지 설명이 따라붙었지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쏟아붓는 감정의 주된 주제는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 

는 것이었다.


 사실인지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젊은 시절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이나서 재산도 아이도 모두 빼앗기고 버림받는 바람에 정신이 나가서 미쳤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로 계속 이 곳을 떠돌면서 남성은 자신을 버린 남편으로, 여성은 남편과 바람이 난 여자로, 아이는 잃어버린 자식으로 여기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참 안된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일 중에서 치유되기 힘든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것은 틀림이 없다. 그렇지만 평생을 그 상처를 헤집으면서 그 자리에서서 늙어가고 있는 것 또한 틀림없었다. 


 어디선가 들은 얘기가 떠오른다. 누가 선물을 줬는데 기쁜 마음으로 열어보니 안에 쓰레기가 들어있었다. 실망스럽고 농락당한 것 같아 화가 난다. 그렇지만 '쓰레기네.' 하고 버리면 그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행동한다.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틈만 나면 선물 상자를 열어 보면서 '어떻게 나에게 쓰레기를 줄 수 있지?' 분노한다.

빨간 우산 할머니는 실존 인물이지만 엄청나게 드라마틱한 모습을 통해 나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었다.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마음은 나를 항상 그 자리에 머무르게 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아무리 억울하고 아파도 용서할 때 내가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자는. 


 이 글은 메모해논지 오래 되어서 출처는 모르겠다.

눈만 뜨면 청소 일을 하러 나갈 당시,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움직임이 그렇게 무거웠던 시절, 의미를 찾든 못찾든 사람은 눈을 뜨면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기본을 자각하는데 도움이 된 글이다.

 내 안의 노숙인 DNA를 두렵게 확인시켜준 나의 노숙인 친구들에게 바친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젤은 달린다. 사자도 달린다.

 가젤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달린다.

사자는 굷어죽지 않기 위해 달린다.

우리가 가젤인지, 사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달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대상과 접촉하는 것으로 세상을 느낀다. 외부의 부정적인 감정에 더 취약한 사람이 있고, 같은 조건이라도 덜한 사람이 있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스스로 청소하고 정리정돈 하면서 보다 가치있고 아름다운 것들로 재정비하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럼으로써 흩어져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의 조각들을 모으는 것이다. 

 일생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고 발현시키는 것으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삶의 목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상처를 보듬고 자신과 타인을 용서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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