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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정옥 Feb 04. 2023

색채의 울림으로 충만해진 하루

-노은님 유고전을 다녀와서

오랜만에 노은님 작가 이름을 검색했다가 '노은님 유고전'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유고전이라면 돌아가셨다는 말이었다. 3년 전인가... 서울에서 전시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찾아가서 전시도 보고 작가님을 꼭 한번 뵙고싶다는 생각을 했었다가, 먹고 살기 바빠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는 다음 기회로 미뤘었는데, 미뤘던 그 일을 3년이 지나 돌아가신 다음에야 찾아뵙게 되었다.

내가 노은님 작가를 알게된 것은 10년 전쯤이었다. 그때는 3년 전 보다 더 먹고사는 일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유치, 초등, 중등을 두루 시간 강사를 하면서 청소 알바를 병행하며 투잡, 쓰리잡을 뛰고 있었다. 내 삶에서 가장 오랫동안 해와서 가장 익숙하고, 쉽고,  잘 할 수 있는 일인 그림으로 아이들과 만나고 있었다. 그런 틈틈이 아이들 그림 같은 그림을 찾아보면서 화가의 꿈도 기억하면서 살던 시절이었다.

정확한 기억은 안나지만 아마도 '아이 같은 그림', '아이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 정도의 키워드로 검색을 해서 알게되었지 싶다. 그러한 키워드로 펼쳐진 세상에서 보여진 그림들과 화가들이 꽤 있었지만 그닥 내 마음에 와닿지 않았는데, 노은님 화가의 세상이 내 눈에 처음 보여졌을 때, 한번 보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카리스마의 외모와 맑게 빛나는 순진한 색채가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이후로 나는 '노은님' 이라는 이름의 관련 검색어들을 뒤지기 시작했고, 본능적으로 목표를 향해 마우스를 클릭해댔다. 맛있는 음식이 가득 차려진 뷔페에서 정신없이 먹어대는 것 처럼 선명한 하늘색, 짙은 초록색, 나른한 분홍색, 따뜻한 노랑색, 힘찬 붓질, 즐거운 생명체들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행복한 그림들을 '다른 이름으로 저장'해댔다. 고단한 일상 속에 찾아오는 휴일이 되면 달콤한 간식들을 몰래 숨겨둔 서랍을 열듯이 반짝이는 그림들로 가득한 폴더를 열었다. 특별히 말을 걸어오는 그림들은 칼라 프린트를 해서 벽에 붙여두고 자주 들여다보았다. 그 분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찾아보면서 신데렐라와 같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인생 역정에 사로잡혔다. 그 분이 쓴 책도 모조리 사 읽었다.

글도 그림과 같았다. 한치의 꾸밈없는 담백한 언어가 툭툭 뒤통수를 치고 덮석 안아주는 느낌이었다.

읽은지 오래된 글인데도 여전히 마음에 남아있는 문장들이 있다.

'외로워서 괴롭고 괴로와서 외로웠다.'

'젊은 날, 사는게 벌받는 것 같았다.

벌 받아서 뻣뻣해진 두 팔로 만세를 부를 날도 온다.'

닥치는대로 일을 하면서 꿈과는 멀어져버린 삶 속에서 길을 찾고 있던 나에게 노은님 화가의 글과 그림은 커다란 힘이 되어 한 방향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었다.

한번은 그 분이 많은 사람들이 모인 큰 운동장에서 강의를 하러 연단에 오르는데 내가 조교로 의전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쉬는 날이면 작업실에 틀여박혀서 벽에 붙여둔 그림들을 따라 그리기도 했고, 덕분에 몇몇 습작을 팔아먹기도 했다.

이 까지가 내 인생 어두운 골짜기에서 등불이 되어준 노은님 화가에 대한 추억담이다.

그 추억을 회상하면서 유고전이 열리고있는 경주 솔거미술관을 향했다.

그림을 보게되면 눈물이 쏟아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단편이나마 그분의 인생과 그림이 내 삶 가장 깊고 어두운 골짜기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관에 가까워지자 기분좋게 설레는 긴장감이 들기 시작했다. 겨울의 끝, 얼음이 풀리는 호수와 새소리, 가파른 흙길에 나있는 나무 계단을 오르면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 같았다. 모처럼의 청아한 공기 속에서의 산책 또한 그분의 선물인 것만 같았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유리 케이스 안에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두색 색종이로 접은 종이개구리, 흙으로 빚은 욕조 안에 있는 사람, 작은 엽서 그림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노은님 작가가 곁에서 '외롭고 괴롭고 심심해서 그렸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어진 초록의 방에 들어서자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림이 압도적인 스케일로 위용을 뿜어냈다. 짙은 초록으로 거칠게 붓질 되어있는 그림 가운데에는 검은색 나무가 두발을 벌리고 갑게 맞아주었다. 

막막하고 어두운 숲속에서 무서운 기분을 느끼다가 갑자기 나타난 호의적인 생명체에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오랜 기다림과 설레임과 긴장감으로 먼길을 오느라 약간 피곤해진 나를 맞이하라고 노은님 화가 대신보낸 것만 같았다. 그림 한 가운데에 서서 나도 두 팔을 벌려서 화답했다.

이어진 흰색 방에 들어서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순전히 색채, 색채 때문이었다.

몬드리안의 일화가 떠올랐다.

어느 날 몬드리안이 산책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작업실에서 아름다운 광채를 발산하는 그림을 보고 황홀함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거꾸로 놓인 자신의 그림이었다.

몬드리안은 이 우연한 체험을 통해 형태를 버리고 선과 색만으로 이루어진 그림도 감상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았고, 그것을 시도한 것이 추상출발점이 되었다는 추상미술 탄생 배경이 되는 일화다.

흰색 방에 알록달록 사탕같은 동그란 색채들이 떨어뜨려져 즐거운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고, 조금 전의 어두운 초록방에서의 감정이 한순간에 확 밝아졌다.

노은님 화가의 지도교수였던 한스티만이 몬드리안의 제자였다는 사실도 이 순간 색채의 울림에 공명했다.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다. 생각보다 감정이 깊었기 때문이리라.

끝으로 노은님 화가가 남긴 말들을 기한다.

"화가는 어부와 비슷한 것 같다.

 빈종이에 무엇이 채워질지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한다. 그래서 항상 두렵다. 확실히 잡힌다는 보장이 전혀 없는 것에서 시작해서 잡으면 아주 좋은 날이고, 못잡으면 내일 또 나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림은 삶의 숙제를 푸는 도구다."

"생각이 있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그냥 시작해서 놀아야 한다."

"자기가 하고싶은 것을 시도해보라.

못해본 것을 해보라.

멋대로 살아보라."

오랜 세월, 내가 그분을 좇았던 '그 무엇'을 생각한다.

따라 그렸던 물고기, 꽃, 오리 그림 속에 흐르고 있었던 '그 무엇'을 생각한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오직 자신을 믿고 빛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던 정신 생각한다.

그분을 닮아, 나도 그렇게 내 삶의 숙제를 푸는 도구로서의 무언가를 찾으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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