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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정옥 Mar 02. 2023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내가 되찾고 싶은 시간을 기억하며

1년 3개월만에 오래 전 같이 근무했던 동료 선생님을 만나뵈었다. 카톡을 보내자 단지 어제 연락되었던 느낌의 답변이 왔다.

'제가 지금은 전화를 할 수 없어서 10시 이후에 가능한데 혹시 너무 늦지 않을까요?' 

괜찮다고 하여 통화가 이루어졌다. 역시 어제 통화한 느낌으로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통화가 시작되었고, 예의 그 '30분이나 40분쯤'이라는 애매한 시점으로 시간 약속을 하셨다.

다음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정갈한 마음이 일어났다. 이번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20년 전에 같이 일을 했고, 그 이후에 같이 공부모임을 했고, 10년 전 쯤 부터 1년에 한번 정도 뵐 때 마다 늘 그런 마음이었다. 다음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마음은 그 시간에 온전히 집중하게하고 최선을 다하게된다. 다음에, 또 언젠가... 그런 막연한 약속이나 기대는 하지 않고 살기로 했다. 

약속을 하고 사흘 후에 뵙게 되기까지 통화할 때 부터 걸렸던 '30-40분'이 자꾸 생각이 났다. 이렇게 약속을 하면 그 시간 주변으로 틀림없이 혼돈의 사건들이 출현하게 될 것이 예상되었다. 역시 약속 시간 즈음되어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고,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문자가 와 있었다. 아무래도 이 지점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게 좋을 것 같았다. 

선생님과 대화는 늘 그렇듯이 참 좋았다. 충만했다. 내가 살아온 시간에 대한 위안을 주시는 마법같은 언어를 가진 분이다. 내가 어떤 자랑을 하든, 어떤 찌질한 짓을 했든 그 모든 것을 아울러 나라는 사람을 좋게 바라보는 시선의 필터로 걸러서 정리된 말씀을 해주심으로써 내 기를 살려주신다. 

마무리를 해야할 시간이 되었을 때 즈음 최대한 완곡한 태도를 갖추고 말을 했다. 문제의 '30-40'분에 대해서.

말을 꺼내자마자 선생님은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듯한 모습으로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게 내 인생에서 제일 어려운 과제라고 말이다. 딱 하나로 결정하지 못하는 그 문제 때문에 다른 많은 요소들이 혼재되고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것에 대해서 사실 본인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터였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안된다는 탄식을 연발하셨다. 

시간은 내 지도에 점을 찍는 것이다. 분명한 점을 보면 우회하지 않고 직진할 수 있다. 확실하지 않다는 것은 예측이 잘 안된다는 것이고, 양쪽을 다 잘 하고싶다는 욕망의 발로이고, 또한 양쪽에 다 피해를 줄 수도 있다는 단서다. 그래서 흐릿하게 여러개의 점을 찍어놓으면 우왕좌왕하면서 고갈되게 마련이다.

선명한 점, 분명한 목표의식으로 내 세계는 출현한다. 

지적질을 감행한 나 자신이 그렇지 못했기에 잘 못 살아온 시간에 대한 통탄을 통해 공부하고 생각한 것이니 나는 잘 하는데 너는 그렇지 않다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런 작은 습관을 통해 새어나가는 에너지가 얼마나 큰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씀드린다는 점을 선생님은 대번에 알아들으시고 지금 이 시점에서 자신에게 너무나 필요한 말이었다고 하시며 몇번이고 고맙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래도되고 저래도되는 것, 아무래도 좋다는 무경계가 주는 편안함 또한 맑고 투명한 경계를 지키는 것으로 부터 생겨난다.


선생님께 들은 인상깊은 여러 에피소드들 중 현재의 내 안에 있는 욕망에 연결되었던 이야기는 어머니의 치매에 관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치매가 있으시다는 것은 지난 번에 뵈었을 때 들었는데,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에 대해서 듣기는 처음이었다. 어머니는 눈만 뜨면 그렇게 글을 쓴다고 하셨다. 쓰기는 쓰지만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온데 종이가 널부러지고 정리도 안된다고 말이다. 내가 들은 것은 딱 이까지다.

그 무질서의 풍경이 내 안에 들어오자 나의 목표와 욕망과 불안이 동요되기 시작했다. 수년간 미루고 있는 내가 쓰고 싶은 단어의 목록들이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숙성의 시간'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위안하고 있었지만, '미루고 있다'는 나태와 회피가 진실이라는 것이 치매걸린 어머니의 글쓰기 이야기를 듣자마자 확연해졌다.

선생님은 약속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된 것을 감사해했지만, 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통해 나의 글쓰기에 대해, 내 시간에 대해 돌아볼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올라왔다. 

치매라는 질병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들은 정도라서 전문적인 지식은 없다마는 기억의 연결부위가 손상되어 연속되고 체계적인 사고가 안되는 특징이 있다는 것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런 병적인 상태에서도 뭘 쓰는 것에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쓰는 행위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시기는 하지만 맥락이 없고, 정리가 안되어 유용한 가치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종이조각으로 치부되는 글쓰기가 되고마는 것이다. 평생 교사로 근무하셨던 어머니가 매일 쓰신다는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1년에 한번 뵐 때 마다 여전하고 따뜻한 위로를 받는 선생님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서면서 발걸음이 빨라졌다. 침침해오는 시력과 희미해져가는 총기를 다잡으며 읽고 쓰고 있는 지금의 성실이 나태와 회피로 여겨졌음이다. 느려진 근육을 빠르게 펌핑해야한다는 전략이 떠올랐다. 그리고, 최근에 읽고 있는 책에서마다 신기할 정도로 간간히 인용되어 제목만 수십번을 쓰게되는 책, 수 년전 부터 책을 읽을 때 마다 레퍼런스로 등장했던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민음사 15권 세트를 마침내 사고야 말았다. 6개월 무이자 할부 결제를 하는 것으로 읽어내겠다는 의지를 듬뿍 실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언젠가는' 읽겠다는 생각을 한지가 어언 10년은 된 것 같다. 그 '언젠가는'이라는 막연한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 내 지도에 선명한 점으로 찍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동안 막연하게 동경하면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무성한 소문만으로도 내가 이 책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들이 참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 책의 도착을 설레임 속에 기다렸다.

마들렌을 홍차에 풀어서 먹는 유명한 장면으로 부터 거대한 기억이 펼쳐지는 의식의 흐름 기법의 방대한 소설이라는 것, 작은 과자 마들렌을 먹는 장면의 묘사가 장장 10페이지에 이른다는, 읽기에 대한 겁을 주는 정보, 첫 단어가 '오랜 시간'이라는 것, 그리고 그 첫 단어가 마지막 단락 '시간 속에서'와 맺어지는 관계에 대해서, 내가 좋아하는 버지니아 울프가 '진정으로 가장 큰 체험'이며,'이 책이 있는데 과연 무엇을 앞으로 쓸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했다는 사실 등등...

그리고 크고 무거운 책 상자가 도착했다. 누군가는 1년 동안 읽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누군가는 평생 동안 읽겠다고 한다는 진술들이 떠 오르기에 충분한 육중한 몸체가 드러났다. 나도 이 설레고 두려운 책 앞에서 나만의 계획을 세울 것이다. 페이지를 넘길 때 마다 나의 마들렌과 나의 콩브레를 떠 올릴 것이고, 나의 질베르트를 생각할 것이고, '책 읽기를 좋아하며 장차 작가가 되기를 열망했던' 화자인 '나'를 통해 '그게 바로 나'라는 눈물 겨운 꿈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풀이 죽어있는 쓰기의 불씨가 다시 타오를 것이다. 잃어버린 나의 시간과 나의 기억과 나의 꿈을 찾게 될 것이다. 더 연결되고 더 구체적이어진 형태로. 그 점이 가장 기대되고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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