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기억이다. 내가 직접 겪었던 일인지, 들어서 상상으로 알고있는 장면인지는 모르겠지만 증조할머니가 텔레비전을 보고 말씀하셨던 장면이 떠오른다.
"참 신기하제. 우째 사람이 저 통 안에 들어앉았노?"
직접 보았든, 들었든 간에 당시의 어린 나는 할머니가 참 바보같다고 생각했다.
50이 넘어 새 봄을 맞이하고 있는 나는 그 옛날 할머니같은 신기함을 느끼고 있다.
이론으로야 정보의 바다에서 단어를 입력하기만 하면 다 나오는 것이지만, 때때로 무선으로 작동되는 전자 기기들이 참 신기하다. 점차 얇아지고 가늘어지고 마침내 없어지고도 연결되는 스마트함에 매료된다.
그보다 더 신기한 것은 이 맘 때쯤 항상 올라오는 감탄이다. 바로 나무를 뚫고 올라오는 꽃이다.
다 죽은 것만 같던 겨울 나무 속에서 어떻게 견디고 준비하다가, 어떻게 알고 딱 이 때에 용맹스럽게도 세상에 나오는지 말이다.
표현은 달라지겠지만 언젠가부터 매년 봄마다 늘 비슷한 글을 썼던 것 같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글도 그랬을 것이다. '만물이 소생하는'-상투적인 표현을 안쓰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만물이 소생한다'는 표현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는 듯하다.-봄이 오는 길목에서 뇌의 시냅스가 그 어떤 때 보다 빠르게 풍성하게 연결되는 것 같다. 비발디의 봄으로 부터 시작해서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왈츠, 클림트의 키스, 릴케의 다정한 편지들, 같이 봄을 좋아하는 친구의 얼굴... 다른 계절보다 유난히 같은 정서의 선에 나를 데려다놓는 것도 죽은 듯한 나무를 뚫고 올라오는 꽃과 같은 기세가 내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여름, 가을, 겨울에는 그런 표현을 잘 안쓰는데 유난히 봄에는 '봄이 오는 길목'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마중나가고 싶은 반가움이 서려있는 표현일 것이다.
스파크를 튀기며 떠오르는 수많은 편집증적 자아의 경쟁 속에서 오롯이 떠오른 시 하나를 음미하며 오늘 아침 브런치를 마치려한다. 다음 시를 소개하자면 이렇다.
'중학교 때, 문학이란 것에 아련하게 매료될 무렵에 알게되어 감성의 불씨가 횃불로 타오르게 했던 애장 시로써 해마다 봄 기운이 돌 때 즈음 어김없이 떠올라 한나절을 그리움의 정서에 사무치게 한다.'
참, 하나 더 덧붙이자면 이번에 이 시를 다시 읽으면서 받았던 충격이 있었다.
'나는 아직 사랑을 모르지만 우정을 알고 그리워하는 나이'
중학교 때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공감했던 대목이었는데, 이 나이 먹고도 아직도 그렇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의미에서 말이다. 어찌됐든 사랑스러운 시를, 잘 살고 있을 내 단짝 친구에게 보낸다.
우리가 좋아하는 봄바람에 실어서. 부디 기쁘게만 사시기를!
만나고 싶어라, 봄이 오는 길목에서
돌담을 끼고 옛 길을 걸어가면
그리움이여 일렁이는 아지랭이여
개나리 노오란 숨결이 되어
민들레 샛노란 미소가 되어
숨이 차 오르고 숨이 가빠 오르고
아아 그 시절 단짝 친구야
나는 아직 사랑을 모르지만
우정을 알고 그리워하는 나이
봄 햇살 느껴지듯 느껴지는 내 짝아
새 봄이 오는 길로 마중 나아가면
통나무 다릿목 그 어디에서
우연처럼 문득 만나질 것만 같아
봄이 오는 다릿목을 혼자 건너가면
저만치 활짝 웃는
내 단짝 네가 있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