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비싼 작가 수업
출근 첫날, 꿈을 위해서 허드렛일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결기로 지원했지만 막상 룸메이드가 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근무하는 객실은 지상이었지만 하우스키핑 사무실과 옷을 갈아입는 파우더룸, 샤워실, 유니폼을 반납하는 세탁소, 쓰레기장, 공동식사가 이루어지는 식당 등은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자취하던 시절에도 아슬아슬하게 지하는 면했었는데……. 지하라는 공간은 적어도 우리 사회에서 저소득층, 빈곤층, 실패자의 상징인 것만 같았다.
스캐쥴러를 따라 지하 복도를 걸어가면서 군대에 온 기분이 이런 게 아닐까? 더 내려가자면 감옥이나 지옥에 온 기분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벌이라도 받는 기분이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 삶을 위해서, 꿈을 위해서 선택한 일일 뿐인데 아직 알지 못하는 세계를 대하는 두려움으로 온몸과 마음이 위축되었다. 위축된 몸과 어둡고 습한 지하 공간 사이에서 만들어진 음울한 영상들이 공중에 떠다녔다.
다행히 그 음울함을 밀어내는데 도움이 되는 존재가 있었다. 내 옆에서 나와 같이 위축되어 있는 입사 동기였다. 식권과 유니폼을 받는 동안 슬쩍 본 얼굴은 놀라웠다. 귀부인을 연상시키는 희고 깨끗한 피부에 반짝이는 금테 안경을 쓰고 눈이 심하게 초롱초롱했다. 나이는 나보다 더 어려 보였다. 저렇게 예쁘고 어리고 부티 나는 사람이 무슨 사연으로 이런 곳에 왔을까? 내 코가 석 자인데 빛나는 동기를 보자 그 사람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같은 운명의 배를 탔다는 것만으로 의지하게 되고 응원하게 되는 내 옆자리 사람의 첫인상이 좋아서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지옥에도 분명히 좋은 점이 있다.
락커와 유니폼과 한 달 치 식권을 받고 일을 가르쳐줄 멘토 언니를 소개받았다. 동기의 멘토 언니는 보자마자 말을 쏟아냈고, 내 멘토 언니는 필요한 말이 아니면 말을 하지 않았다. 멘토 언니를 따라 스테이션에 갔다. 스테이션은 호텔의 각 층마다 하나씩 있는 공간으로 수건, 가운, 어메니티, 커피, 차, 생수, 문구, 슬리퍼 등 객실에 들어가는 소모품 일체를 보관하고 객실 정비가 없을 시 메이드들이 대기하는 공간이다.
이 공간의 이름인 스테이션은 여기에 있는 동안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동음이의어인 스테이션 즉, 역에 대한 상상이었다. 아침이 되면 카트에 준비된 물품들을 가득 싣고 역을 떠나 하루 일을 다 마치고 다시 역으로 돌아온다. 어떤 날은 내 몸의 컨디션도, 객실들의 컨디션도 좋아서 가볍고 빠르게 기분 좋은 성취감으로 복귀하게 될 때도 있고, 어떤 날은 내 컨디션이나 객실들의 컨디션이 안 좋아서 엄청 고전하다가 힘겹게 복귀할 때도 있다.
호텔의 스테이션이든 기차역의 스테이션이든 스테이션에 대한 유일한 희망은 좋은 날은 좋은 날 대로 힘든 날은 힘든 날 대로 항상 돌아온다는 것,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 끝에서 비슷하게 반복되는 낡은 시작과 차이가 있는 새로운 시작이 있다. 그 선택과 책임은 나의 몫이다. 역에서 차를 놓치기도 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안 오기도 하고, 이별을 하기도 하며 물건을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그 모든 불운과 불행을 치르고도 역은 늘 기대의 공간이다.
우리는 매일 출발한다. 두려움과 설렘의 양가감정을 안고서. 매일 나 자신과 또 세상과 만난다. 그 만남에서 무언가 시도한다. 그 시도에 따른 성취감이나 패배감을 안고 돌아온다. 누구에게나 두려움이 있고 희망이 있다.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도 약간의 두려움은 있기 마련이고, 두려움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도 일말의 희망이 있기에 출발을 선택한다.
호텔의 이름은 따로 있었지만 내 마음속으로 지은 이름은 헤르메스였다. 헤르메스는 목자의 신, 길과 여행의 신, 약탈과 도둑의 신, 사기의 신, 상인의 신, 발견의 신, 비상의 신, 치유의 신으로 끼지 않는 데가 없을 만큼 많은 역할과 활동성을 상징한다. 자신의 책략으로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이루어 내고 끝까지 살아남는 법을 알고 있는 똑똑한 신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독특하고 처리능력이 빠르며 영리하고 사리분별이 밝다. 낡은 무엇이든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서 재탄생시키는 힘이 있다.
지금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생존이다. 살아남아야 다음이 있다. 호텔에서 일하는 동안 이와 같은 헤르메스의 힘을 의식하면서 나의 능력을 재발견하고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인간으로 성장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담아 내가 새로이 다닐 일터에 부여한 퍼스널 브랜딩이다. 지금부터 나는 호텔 헤르메스에 간다. 이건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작가 수업이다. 의미를 한가득 들이부으며 유니폼을 갈아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