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어두운 곳의 빛이 가장 밝다
호텔 헤르메스와 시지프스 ROOM11, 신적인 힘이 들어간 퍼스널 브랜딩으로 뾰족하게 무장했음에도 인간적인 육체와 정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일상은 쉽게 뭉툭해지기가 일쑤였고 한 줄도 글을 쓸 수 없는 무력한 나날이 지속되었다. 그 와중에 갑질하는 고객이나 방을 엉망으로 쓰고 간 손님들, 호텔 방에서 자살한 사건, 주임과 동료들의 미운 행동 등 소설로 쓰고 싶은 글감들이 거품처럼 끓어올랐다. 쓰지 않으면 날아가 버리는 단어들을 스캐쥴표 뒷면에 이면지를 끼워서 메모하기 시작했다. 업무 중에 단어로만 써 논 메모를 나중에 한 줄로 요약 정리했다. 가령 이런 식이었다. 복도에서 음악 소리가 들리자 춤을 추기 시작한 외국인 꼬마 아이가 인상적이어서 ‘소녀, 춤, 피아노’라고 메모해 둔 단어를 저녁에 한 줄 문장으로 만들었다. ‘음악 소리가 들리자 금발의 소녀는 나뭇가지 같은 하얀 팔을 흔들며 춤을 추었고 나는 그 음악이 옛날 피아노 학원에서 배운 소나티네 연습곡이란 걸 생각해 냈다. 다음 달 나는 용기를 내서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등록을 했다.’ 채집한 단어에 과거의 경험이나 꿈의 이미지 등을 섞어서 한 줄의 문장으로 만들었다. 아직 쓰지 못했지만 언젠가 한 편의 소설이 될 씨앗이라고 생각하면 바빠서 식사를 거르는 날에도 배가 불렀다. 이곳에서는 늘 예측을 뛰어넘는 많은 일이 일어났고, 메모할 게 넘쳐났다. 어떤 날은 아침에 준비한 메모지가 부족해서 오후에는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깨알 같은 글씨로 메모를 했다. 앞치마 주머니 속에 욱여넣어뒀다가 물에 젖거나 버려지기도 했다. 조용하고 깨끗한 날일수록 글감이 적었고, 바쁘고 더럽고 추악한 것들을 대면하는 날일수록 글감이 많아졌고, 배워갈 것이 많았다.
일에 적응이 되고 나자 열한 개 기본을 다 하고도 정해진 시간보다 빨리 마쳐지는 날도 생겼다. 그런 날은 스테이션에서 다음 날 비품 준비를 하고 나머지 시간은 퇴근 시간까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동안 메모한 이면지들을 묶어서 작은 수첩 형태로 만들었다. 나는 이 수첩을 ‘원 라이너’라고 불렀다. 메모한 단어들을 연결해서 한 줄로 만드는 형식 때문에 붙인 이름이었고, 바쁘고 힘들어서 한 문장으로 만드는 것조차 도전적인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서 스캐쥴러와 친해지고 사무실에 드나들기도 하면서 이면지를 묶음으로 사용해서 작은 수첩보다 더 크고 두꺼운 원 라이너를 만들기도 했다. 표지로 버려지는 과월호 잡지를 사용했는데, 손님들에게 제공되는 신상 명품 컬렉션이었다. 시계, 보석, 자동차, 모피코트, 명품 백, 구두, 내 월급에 해당하는 한 끼 식사 등등 값비싼 물질들이 인쇄된 두꺼운 종이의 일부를 잘라서 원 라이너 표지를 만들면서 시지프가 느꼈던 신도 모를 기쁨이 느껴졌다. 글을 쓰는 것도 좋았지만 글을 쓰겠다는 생각으로 종이를 묶을 때면 채셔 고양이가 말했던 ‘어디로든 가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방향이 보였다.
글감 노트, 원 라이너를 만드는 것 말고도 또 다른 즐거움을 발견했다. 침대 사이드 테이블 서랍 안에 성경책이 들어있었다. 빨간색 가죽 표지의 성경책은 고객을 위한 기본 비품 중 하나로 정비할 때마다 서랍을 열어서 왼쪽 아래의 정해져 있는 위치에 반듯하게 세팅하는 것이 성경책에 대한 메이드의 임무였다. 서랍을 열 때마다 단지 정리 정돈하는 것이 아니라 읽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지만 업무 중에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한번 든 생각은 자꾸 커져서 덜 바쁜 날 한 번은 뭔가를 훔치는 듯이 성경책을 펼쳤다. 무작위로 펼친 페이지에서는 그 순간 나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 적혀있었다. 별을 보고 길을 찾았다는 옛사람들처럼 보인 글들이 내 길을 환하게 비춰주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6)
청하여라, 주실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마태복음 7:7)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으니 우리가 이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 함이라.
(테살로니카전서 2:4)
복음은 기쁜 소식이다. 마음의 쉴 곳이고 정신이 새롭게 솟아오르는 순간이다.
매일 열한 개의 방을 청소하는 일에 신화를 대입시키고, 피곤한 육체에 졸음이 쏟아지는데도 이해가 안 가는 헤겔을 펼쳐놓고, 스캐쥴표 뒷면에 글감을 기록하고, 갈급한 마음으로 성경을 뒤적였던 그 모든 행위의 밑바닥에는 뿌리 깊은 불안이 있었다. 인생길 반 고비에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처했던 중 가장 깊고 어두운 곳, 호텔 지하는 그동안 회피해 왔던 깊은 불안과 대면한 통과의례였다. ‘가장 어두운 곳의 빛이 가장 밝다’는 상투적인 말이 내 몸을 통과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