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원자로 되어 있다
추억의 힘을 담아 공모전에 응모한 작품이 수상을 했고, 시작할 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인터뷰도 하고 내 인생에 의미 있는 하나의 이벤트가 되었지만 축제의 열기가 식었을 때, 그것은 불꽃의 한 단면일 뿐 지속 가능한 삶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12시가 되자 마법의 힘이 사라지고 호박 마차가 생쥐로 바뀌어 쥐구멍 속으로 들어가 버린 후, 음산한 공기 속에서 칼 융의 <기억 꿈 사상>을 읽고 있었다.
‘이토록 아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나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버려 둬 보자.’
칼 융의 독백은 정확하게 그 당시의 내 상태를 대변하고 있었다. 칼 융은 자신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충동에 맡겨버렸을 때의 성공적인 경험을 기술했다. 그렇게 하여 칼 융이 얻은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다. 칼 융은 벽돌로 집 짓는 놀이에 열중하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감격스럽게 떠올린다.
‘아하, 여기에 삶이 있구나! 그 작은 아이는 여전히 여기에 있고, 내게 결여되어 있는 창조적인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거기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질문했고, 그 시절과 다시 이어지기 위해서 그곳으로 돌아가 아이의 놀이를 하며 아이의 삶을 한 번 더 살아보기를 택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운명의 전환점이었다고 말한다. 칼 융은 호숫가에서 돌들을 찾아 모아서 작은 집들과 성과 마을 전체를 짓기에 이른다. 그 진지한 놀이를 통해 자신의 신화에 이르는 길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 이후로도 인생에서 장애에 부딪힐 때마다 돌과 접촉함으로써 자신을 다시금 안정시키고 도움을 얻었다고 했다.
그 내용을 읽었을 때 나에게도 “아하!” 체험이 왔다. 칼 융이 어린 시절의 놀이를 떠올리고 실행해 옮겼듯이 나도 같은 체험의 일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코로나 팬데믹의 습하고 무거운 공기 속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크나큰 체념과 불안 속에서 아이가 만든 것 같은 종이 놀이나 스톱모션 영상들을 들여다보는 것을 유일하고도 큰 낙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그 생각은 곧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실행력을 불러왔다. 칼 융이 돌을 찾았듯이 종이를 찾았다. 색연필과 가위, 풀, 카메라와 조명, 편집 프로그램, 유튜브 계정만 있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의 한 줄 감상문 ‘우주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작다.’를 반영하여 ‘미니수퍼 스톱모션(miniSUPER stopmotion)’이라는 유튜브 채널 이름을 지었다. 이 이름은 나중에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복음 3:30)는 말씀과 일치를 이루었다.
어린아이가 되어 즐겁게 그림을 그리고 촬영해서 첫 작품을 만들 때까지는 좋았지만 막상 세상에 내 보내려고 생각하니 주춤거려졌다. ‘이렇게 못 만든 걸 올리면 욕먹지는 않을까?’ 조심스러웠다. 곧 어릴 때 행복하게 했던 종이 놀이와 로모 카메라로 일상을 찍으며 자취 시절의 외로움을 감성적으로 남기고자 했던 열정을 떠올리고 웹 디자인을 하는 동안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 지겨울 정도로 다루었던 포토샵의 능숙함을 연결했다.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종이 놀이를 다시 하면서 이미 마음의 안정과 기쁨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애초의 목적이었던 구독자 수나 조회수, 좋아요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어갔다. 많은 시간과 작업량이 소요되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고되었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고단함과 재미와 호기심은 실력 향상이라는 다음을 데려왔다.
꾸준한 작업으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을 때, 단지 취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수익화를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구독자 수가 늘지 않자 또다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1년 동안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해보고 다음을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코로나 팬데믹의 암울한 시절을 종이 놀이에 푹 빠져서 보냈다.
스스로 약속한 1년이 되었고, 정신 승리는 했을지언정 수익화는 아득하게 먼 실패라는 냉혹한 결과를 인정해야만 했다. 칼 융이 어린 시절의 놀이로 자신의 신화의 길을 찾았다지만 그 길은 생각보다 멀고 험난했다. 칼 융이기에 가능했던 것이었을까? 체념 속에서 시냇가를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어둠 속의 유튜브 화면에서 또 한 번 ‘마음속에서 기뻐 어쩔 줄 모르고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바로 지금 이 순간, 내가 체념하고 있는 대상인 종이 스톱모션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던 상황에서 즐겁게 보았던 스톱모션 채널에서 애니메이터를 모집한다는 채용 공고였다. 마감 날짜를 확인하자 아직 마감일이 남아 있었다. 응모 요강대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 이것 아니면 방법이 없다는 생각으로 준비했던 공모전들과 그것들을 모아서 수익화를 시도했으나 현재로 실패한 유튜브 채널이 오롯이 포트폴리오가 되었다. 마치 지난 1년간의 노력이 이 포트폴리오를 만드는 작업이었던 것처럼.
1차 서류심사, 2차 포트폴리오 심사, 3차 영상 인터뷰를 통과하고 취업에 성공했다. 어둠 속에서 바라본 것으로부터의 구원이었다.
종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과정은 이러하다.
먼저 어떤 이야기를 만들 것인가? 스토리와 이미지를 구상한다.
참고가 될 만한 레퍼런스 자료를 수집한다.
이야기의 흐름과 장면을 러프하게 스케치한다.
스토리보드 작업으로 캐릭터 표정, 동작, 소품, 배경, 구도, 색상, 동선, 모션, 효과 등 구현하고자 하는 모든 요소들을 한 장면 한 장면 확실하게 결정한다.
결정된 장면을 종이에 연필로 그린다.
밑그림으로 그려진 연필그림을 확정된 검은 선으로 따서 그린다.
색연필로 채색을 하고 가위로 오린다.
배경과 움직일 소품을 따로 제작한다.
아트워크가 완성되면 조명을 설정하고 계획한 동선과 모션에 따라 조금씩 위치를 움직이면서 카메라로 촬영을 한다.
촬영된 스틸 이미지들을 편집 프로그램에 옮긴다.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필요한 후작업을 한다.
각 장면에 해당하는 시간을 설정한다.
시간을 부여해서 출력한 초기 영상 위에 효과음을 넣어서 완성한다.
스톱모션은 멈춰있는 한 장, 한 장의 그림에 각각 다른 속도를 설정하여 플레이시킴으로써 움직이는 하나의 스토리로 보이게 만드는 일종의 착시현상을 이용한 애니메이션이다. 완성된 애니메이션은 멈추기 전에는 계속 움직이지만 만들어진 과정을 역으로 거슬러 내려가면서 요소들을 분해해 나가면 결국 하나의 이미지이고 하나의 스토리이고, 스토리 이전에 재료이고, 발상이고, 가능성일 뿐이다. 각각의 요소들에 의미를 부여해서 장면을 만들고 스토리를 만들고 속도를 부여해서 일관성 있는 하나의 결과물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언가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스톱모션이다. 우리의 인생도 이와 닮았다.
‘지구가 멸망한다면 남기고 싶은 한마디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물리학자들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있다.’고 답했다.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흔들리는 터전 속에서 삶이 일관된 이야기로 이어지지 않고 길이 끊어질 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모를 때, 떠올리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이다.
‘모든 것은 원자로 되어 있다.’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것에 충실한 것으로부터 삶은 다시 시작되고 결국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