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드 오렌지

정신의 물질화

by 오렌


휴지통에서 건진 남자, 강한솔이 지나간 뒤 길게 드리운 오렌지빛 잔상이 당시에 하고 있던 작업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르몽드 코리아에서 주최하는 쁘띠영화제에 출품할 목적으로 자전적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영상 안에 주최 측에서 지정한 책을 홍보하는 부분이 들어가는 것이 공모 요강의 하나였고, 작업을 하면서도 뭔가 구체성이 결여된 것 같아 마음에 흡족하지 않아서 진행이 더딘 상황이었다. 마침 강한솔이 가져다준 퍼즐 한 조각이 여기에 딱 맞았다. 강한솔로 인해 되찾은 20년 전의 내 모습을 이 스토리에 투영할 수 있었고 작품의 전체 기획 방향을 확 바꾸었다.




제작의도

세상과 단절된 채 네모난 작은 원룸에서 글을 쓰는 작가는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불안한 청춘들을 상징한다. 한 권의 책, ‘마니에르 드 부아르’를 읽음으로써 얻은 새로운 힘으로 환경의 제약과 뚫고 나가지 못하는 사유의 갑갑함을 뚫어내어 시원적인 생명력을 회복하고 활기찬 일상을 지속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시놉시스

#Scene1. 작가의 방

작고 네모난 방, 커피잔이 쌓인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작가가 있다. 화분 속의 식물들은 시들어 가고 전기주전자의 물조차 맥없이 끓는다. 유리 벽을 만나면 뒤돌아가는 책상 위 금붕어는 좁은 생각에 갇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작가의 자아상이다. 타성에 젖은 방식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불안하다. 번 아웃 상태에서 누군가 건네준 '마니에르 드 부아르'는 잠들어 있던 열정에 불을 지핀다.


#Scene2. 해변

뜨거운 열망은 곧 작가를 빛으로 가득한 열대 해변으로 데리고 간다. 원시적인 자연의 공간은 역동적이고 유쾌하며 가능성과 잠재력이 가득한 무의식의 공간이다. (구두 신은 무당벌레, 몸이 긴 호랑이는 각각 '마니에르 드 부아르 VOL.2'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21년 1월호)'에 수록된 이미지를 빌려왔다.) 이곳에서 경계를 넘나드는 즐거운 놀이와 우정, 새로운 관점을 회복하는 것으로만 삶이 지속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Scene3. 새로운 방

새로운 힘을 얻고 돌아온 작고 네모난 방은 달라졌다. 액자 속의 나비 떼가 날아간다. 전기주전자의 물은 더 힘차게 끓어오르고, 시들어 가던 식물들은 생기를 되찾아 꽃망울을 터뜨린다. 좁은 어항 속을 끝없이 오가던 금붕어들은 마침내 유리 벽을 뚫고 앞으로 나아간다. 작가의 방, 근심스러운 마음을 상징하는 나비 떼가 갇혀있던 불안한 오렌지는 이제 사랑의 오렌지가 되었다. 눈이 반짝인다. 손이 힘차게 움직인다.


강한솔이 가져다준 퍼즐은 정체된 이야기에 꼭 필요한 한 조각으로 작용했고 새로운 힘으로 즐겁게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미셸 공드리 감독의 사랑스러운 영화, <무드 인디고>를 오마주해서 <무드 오렌지>라고 제목 붙인 작품은 영광스럽게도 대상을 받았다. 그리고 내 인생에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지면에 실렸다.


-심오하고도 흥미로운 해석입니다.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도 그만큼 즐거우셨을 것 같아요. 혹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작품의 토대를 만들던 중 의미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어요. 20년 전 웹디자이너로 일하던 당시에 운영하던 개인 홈페이지의 구독자와 우연히 연락이 닿았는데요, 그 독자와 당시 제 개인 홈페이지였던 ‘oren.com’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죠. oren(오랜 or 오렌)은 ‘오래된 것을 좋아하고, 오렌지를 좋아해서’ 지은 이름이에요. 바쁜 현실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의 한 조각을 찾은 것이 무척 기뻤습니다. 그 반가운 추억을 붙잡아 가만히 생각하다가, 문득 ‘오렌지’에서 상상 속 세계의 문을 여는 강렬함을 느꼈어요. 작품 <무드 오렌지> 속 주인공의 방에는 오렌지색 나비 그림 액자가 걸려있는데, 무의식의 에너지의 원천인 상상계로 이어지는 낙조의 오렌지색을 표현한 거예요. 이 에피소드가 없었다면 작품의 주조를 이루는 강렬한 오렌지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상을 받고 나서 강한솔에게 편지가 왔다. 아쉽지만 꿈이었다. 수상을 축하하고 늘 지켜보고 있고 언제까지나 응원하겠다는 내용의 글이 옅은 오렌지빛의 향기로운 편지지에 빼곡하게 적혀있는 것이 느껴졌다. 구체적인 문구는 생각이 나지 않지만 푸르름이 가득 담긴 편지, 삭막한 세상 속에서 사랑과 우정의 마음을 기억하게 하는 그 환한 편지는 오래도록 힘을 주었다. 그건 지금 이 세계의 강한솔과는 상관없는 내 마음이 만들어 낸 유용한 환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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