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찾으려는 의지
‘The farmer in the dell’이라는 오래된 노래가 있다.
골짜기에 사는 농부가 아내를 데려오고, 아내가 아이를 데려오고, 아이가 강아지를 데려오고, 강아지가 고양이를 데려오고, 고양이가 쥐를 데려오고, 쥐가 치즈를 데려오고, 치즈가 혼자 있다는 재미있는 내용의 동요다.
꿈속에 나온 프랭크라는 소년의 이미지 하나를 따라가면서 경험했던 일들과 찾아 읽었던 책들과 꿈의 이미지들이 이 노래처럼 다음을 데려오고, 또 다음을 데려와서 조각보 같은 글이 되었다.
그래서 프랭크는 누구인가?
스티븐 킹 원작, “프랭크”다라본트 감독의 <쇼생크 탈출>에 나오는 명장면을 빌려와서 “프랭크”의 존재를 정리해 본다. 살해 누명을 쓰고 교도소에 들어온 주인공 에디는 전직 은행 간부로 교도관들의 세금 면제 등의 편의를 봐주면서 신임을 얻으며 특혜를 누리던 중 교도소장의 사무실에서 음반 하나를 꺼내든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편지의 이중창’>이다. 턴테이블에 걸어놓고, 문을 잠근 다음, 마이크를 켜서 교도소 안 구석구석에 음악이 울려 퍼지게 한다. 죄수들은 이태리어 가사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구원의 노랫소리와 같은 아름다운 아리아를 들으며 잠시나마 자유를 누린다. 이 노래를 생각하며 에디가 하는 독백이다.
‘난 지금도 그 이탈리아 여자들이 뭐라고 노래했는지 모른다. 사실은, 알고 싶지 않다. 모르는 채로 있는 게 나은 것도 있다. 난 그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가슴이 아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프랭크는 내가 찾은 책의 작가나 감독의 이름일 수도 있고, 책들의 주제인 희망이나 용서와 같은 의미일 수도 있고, 나에게 시간 사용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촘촘한 시간관리에 도움을 준 시스템 다이어리, ‘프랭클린 플래너’ 일 수도 있고, 심리학에서 말하는 내면 아이 이거나 무의식의 이미지를 전달해 주는 아니무스(Animus) 일 수도 있다. 또 프랭크라는 단어의 어원인 ‘자유’ 일수도, 모든 우연들을 이어주는 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일수도, 아니면 불안한 마음이 붙잡은 그저 하나의 개꿈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런 이미지 한 조각에 집착해서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게임처럼 십여 년을 추적해 오면서 잊혔던 과거의 기억이 연결되고, 새로운 파생어로 의미가 분화되고, 무엇보다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들이 생겼다.
쇼생크 탈출에서 에디가 노래 가사를 몰라도 말로 표현할 수 없고 가슴이 아프도록 아름다운 이야기였다고 생각하고 싶다고 했듯이 이제 프랭크가 무슨 의미인지 몰라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가 다음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다음 단어를 연결하여 세상을 건너는 다리가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배운 것 같다.
뇌과학에 의하면 나라는 의식의 핵심은 시공간적 연장성인데 뚜렷한 목표 의식 없이, 익숙해져 있기에 조금 더 잘하는 일, 상황이 원하는 일, 다양한 일들을 하며 살게 되면서 파편화되고 분열된 자아는 롤러코스터 같은 삶의 궤도를 만들었고, 일관되지 못한 정체성은 실존적인 불안이 되었다.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는 ‘인간의 선택은 대부분 비합리적이며 서로 연결되지 않은 독립적인 프로세스다. 다만 뇌가 그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토리를 만들어 낼 뿐이다.’라고 말한다.
빅터 프랭클은 자아실현에 지나치게 관심을 쏟는 원인을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있다’고 했다. 프랭크를 붙잡고 연결, 연결해나간 진지한 놀이는 파편화되고 분열된 존재의 무화(無化, nothing)를 두려워하면서 어떻게든 좌절된 의미를 찾으려는 분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