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못하는 것을 읽게 하는 힘

힘을 불어넣어주는 근원

by 오렌


빅터 프랭클은 기본적인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추위와 배고픔 속에서 누추한 생활과 연관된 끊임없이 자질구레한 문제들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을 때, 매일 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고,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그때, 자신이 갑자기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 강단에 서 있었고,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자신의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으며, 자신이 강제 수용소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희망을 생각할 수 없는 처참한 상황 속에서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을 때’ ‘보여진’ 장면이 이후에 현실로 실현되었다는 놀라운 이야기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라고 했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청년 시절 자살 충동에 휩싸이곤 했는데, 그때 자살하지 않았던 이유가 ‘수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신영복 선생님은 회고록에서 죽고 싶은 마음을 돌이키게 한 일화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차가운 1.5평 감방 창문으로 내리쬐었던 신문지만 한 햇볕 때문이었다고 했다.

요식업으로 명성이 높은 사업가 백종원 씨는 젊은 시절 지게 된 큰 빚으로 삶을 포기하기로 마음먹고 홍콩으로 건너갔다. 그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먹은 음식의 신기한 맛은 다음 사업 아이템을 생각하게 했고,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시작해 보자는 마음으로 귀국하여 지금의 성공을 이루어 냈다고 한다.

유튜브 채널에서 본 한 20대 청년은 자살 충동을 느껴서 한강 다리까지 갔는데 죽지 않고 좀 더 살아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이유로 영상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 청년의 영상과 백종원의 음식과 신영복의 햇볕과 버트런드 러셀의 수학과 빅터 프랭클의 강의는 그들이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자신에게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근원을 본능적으로 떠올리는 능력이 외부가 아니라 자신 안에 내장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플라톤은 ‘본다’고 하는 것에 대해 ‘눈 속에서 일종의 팔과 같은 것이 사물에까지 뻗어나가는 행위가 읽기이며, 보는 행위는 이 일에 기초한다.고 했다. 눈에서 뻗어 나오는 촉수는 감각적인 수단에 의해서는 인식할 수 없지만 플라톤이 그 촉수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은 그가 초감각적 세계를 통찰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보는 행위는 자신의 눈에서 생명의 힘을 내보내 대상을 붙잡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김대식 교수의 <인간을 읽어내는 과학>에서 보는 것에 대해 주목할 만한 개념이 나온다. 바로 ‘퀄리어(qualia)’다. 뇌과학에서 우리 눈앞에 무엇인가 보일 때 단순히 보는 동작에 그치지 않고 본 대상을 지각하면서 느끼게 되는 기분이나 떠오르는 심상이 있는데, 그것이 퀄리어라고 한다. 좀비가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퀄리어가 있어야 하고, 퀄리어는 단지 보는 것에서 ‘의미’를 만들어 내는 무엇이라고 한다. 문제는 퀄리어가 객관적으로 관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퀄리어의 존재가 있고, 어떤 의미를 만들어 낸다고 해도 그것을 부정하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결국 퀄리어는 현재의 과학으로도 믿음의 문제로 남아 있다.

이즈음에서 절박한 상황 속에서 책을 고르고 단어를 찾았던 그 갈급한 경험들은 ‘보는 것’, ‘보이는 것’, ‘보여지는 것’에서 의미를 붙잡으며 앞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의지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프랭크가 특정한 실체가 아니라 내가 관심을 갖고 바라보는 모든 것이라는, 한편으로는 득도한 기분과 한편으로는 허무한 마음으로 이제 프랭크가 뭔지 몰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는 혁명적인 책을 만난 것은.

읽을 수 없는 것이 읽을 수 있는 것이 되고, 읽을 수 있는 것이 갑자기 읽을 수 없는 것으로 흐려지는 절대적인 순간 자체가 ‘천사’고 ‘천사적’인 것이다. 읽을 수 없을 터인 것을 읽는 것, ‘읽는다’는 기회를 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천사적인 일이다.

‘읽는다’는 것은 단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뭔가’라고 말한다. 사사키 아타루가 말하는 ‘천사’와 ‘뭔가’, ‘기회’와 ‘혁명’은 플라톤이 말한 ‘눈에서 뻗어 나오는 촉수’, 김대식 교수가 말한 ‘퀄리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 ‘뭔가’가 내가 집요하게 찾고자 했던 ‘프랭크’의 실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런 생각에 도달하자 프랭크가 ‘나를 찾아줘’라고 했던 말의 의미가 곧 ‘읽어라’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곧 프랭크가 안내했던 갤러리나 공연장의 로비 같아 보였던 공간이 도서관으로 해석되었다. 그곳에 있었던 작은 조각들로 맞춰진 커다란 노란색 스마일 입체 퍼즐 조형물은 실패와 이별, 박탈과 상실의 파편들을 모아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완전성을 실현하고 싶은 내면의 욕구가 만들어 낸 소원성취의 이미지였다.

새 머리의 학자가 준 여덟 개의 끈이 달린 폼롤러 모양의 흰색 원기둥은 내가 글을 쓸 때는 펜이 되고, 청소를 할 때는 청소기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흰색 원기둥이 있다. 요리사에게는 칼이 될 것이고, 가수에게는 마이크가 될 것이고, 골프 선수에게는 골프 채가 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더 자주 더 열심히 무엇보다 더 즐겁게 할 때 흰색 원기둥은 그것을 닮아간다. 내가 원하는 바가 있는데 행동은 다른 것을 하면 원기둥은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모양이 되어 버린다. 내가 추구하는 의미들을 촘촘하게 땋을 때 그 형체가 더 견고해질 것이며, 정신을 닮은 물질이 되어갈 것이다.


책을 읽어야 할 시기에 책을 멀리했던 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원죄가 되어 늘 글을 써왔으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억압함으로써 의식적으로 계속 부인했던 심층의 소망을 발견하게 되었다.

라이먼“프랭크”바움이 쓴 <오즈의 마법사>에서 용기를 찾으러 떠난 겁쟁이 사자가 위기 상황에서 가장 용감했고, 두뇌가 없어서 슬퍼했던 허수아비가 누구보다도 지혜로웠고, 심장이 없어서 슬퍼했던 양철 로봇이 가장 마음이 따뜻했던 것처럼 인생을 불행으로 이끄는 문제들을 알아가고 싶은 욕구로 찾기 시작한 이미지 하나에서 시작된 ‘읽기’는 읽기가 멈춘 지점부터 시작해서 읽을 수 없었던 책을 읽게 되었고, 그 길 위에서 나는 무엇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내 인생의 진정한 수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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