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글쓰기를 꾸준히 해오고 있지만 일이 바빠지면 중단되었다가 다시 쓰기를 반복해 왔다. 하루도 빠짐없이 1년 365일을 기록한 적은 아이가 태어난 생후 1년의 기록, 육아일기다.
출산 후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펜을 잡고 글을 쓴 덕분에 이후 한동안은 비가 오면 손가락 마디가 욱신거리는 후유증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발도르프 교육을 알기 전에도 글쓰기를 해왔지만 발도르프 유치원 교육을 받으면서 아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아이에 대해 글을 쓰는 이른바 차일드 스터디(child study)를 매우 중요시했다.
하루에 잠깐이라도 바쁜 것을 내려놓고 오늘 아이의 모습은 어땠는지, 아이가 어떻게 지냈는지, 감정 상태는 어떤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아이의 모습이나 표정, 했던 말, 구체적인 것을 생각하고 한 줄이라도 기록하고 그림이라도 그리게 되면 그 아이와 나 사이에 특별한 친밀감이 형성되는 것 같았고, 특히 어려운 문제를 겪는 아이에 대해서 교사들 모두가 같이 생각해 주는 마음은 마치 인디언들의 의식과도 같았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마법처럼 잘 풀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마음을 쓰고 집중할 때 일어나는 기적 같은 변화들 또한 여러 차례 경험했다. 내가 감탄하고 감동받고 감사하는 발도르프 교육은 그런 측면이었다.
유치원 트레이닝을 받을 당시에 4세에서 7세까지 혼합 연령의 교실에 자폐나 ADHD 같은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도 있어서 초보 교사로서 말도 못 하게 힘들었다. 그만둘 생각을 셀 수 없이 하던 어느 날, 칠순이 넘으신, 유치원 경력 30년 이상 되신 에리카 글렌썸 선생님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회색 머리에 돋보기 안경을 쓰시고 풍채가 좋으신 선생님은 한참을 내 눈을 들여다보시더니 물으셨다.
"가장 어려운 게 뭐냐?"
유치원 교육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질문하실 것으로 예상했는데 뭔가 성스러운 그분의 힘에 압도되어 나는 고해성사를 하듯이 진땀을 흘리며 이런 고백을 했다.
"아이들을 싫어하는 것은 아닌데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아이들과 지내는 것이 즐겁지 않다."
그때 에리카 선생님이 따뜻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해주신 말씀을 들으며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떨어졌다.
"너는 사랑하는 것을 배우러 이 세상에 왔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네 아이부터 사랑하라."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렇게 나는 내 아이부터 사랑하는 방법들을 찾아 용맹정진하였고, 그중 내가 경험하고 실천해 본 것 중에 즐겁게 할 수 있었고, 효과적이었던 것이 일기 쓰기였다. 말을 하지 못하는 아기 때는 육아일기를, 말을 잘하게 되었을 땐 아이가 하는 말일기를. 정말 에리카 선생님 말씀처럼 내 아이 일기로부터 내가 만나는 아이들의 일기로 확장되면서 사랑이라는 어렵고 불편하던 것이, 아이가, 사람이 편해지는 형태로 스며들었던 것 같다. 나에게서 나오는 관심과 온기라는 형태의 사랑은 정말로 흐르고 나눌수록 커지는 거구나. 구체적이고 집중적인 사랑의 연습이었다.
아이가 불편하고 어려운 사람이 아이를 낳아 키우고 유치원 교사까지 하면서 큰 질문이 화두처럼 늘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나?" 지금 여기에서 생각하는 이유는 에리카 선생님 말씀과 동일하다.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다. 아이가 성인이 되고, 유치원 교사도 아닌 지금, 나는 그곳에서 배운 부지런한 사랑을 또 다른 형태로 실천하고 있다. 매일 아침, 글을 쓰는 굿모닝 페이지는 나와 이웃의 모습이나 표정, 했던 말, 구체적인 것을 생각하고 기록하는 부지런한 사랑의 행위이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산문은 부지런한 사람만이 쓸 수 있다'라고. 글을 잘 쓰고 어떤 주제의 글을 쓰고 그걸로 무엇을 하고 무엇이 되는 것 보다 매일 글을 쓰는 부지런한 사랑이 먼저다. 부지런히 쓰다 보면 몰입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생기고 따라서 행복한 순간도 많이 생긴다.
전혜린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자신의 딸 정화 육아일기를 쓰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의도를 밝혔다.
'우리의 영혼의 모든 고뇌는 우리가 다시는 유년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인식과 또다시 돌아갈 수 없는 유년기에 대한 절망적인 향수에 기인하는 것이라 한다. 유년기란 나와 외계가 일체를 이루고 있었고 즉 자(自)와 타자(他自) 사이에 아무런 모순이 없었던 천국적인 시대인 것이며 우리의 존재에는 죄의 때가 묻어 있지 않았었다. 후한이 없었다. 괴로움도 원한도 이 시대를 우리의 영혼은 일생 동안 그리워한다. 이 시대의 잃어버린 기억을 더듬어서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방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로 나는 내 딸 정화가 어른이 된 후에 어느 피곤하고 삶에 실망을 느낀 저녁때 이 글을 펴 보고 잠시나마 동경의 날개를 펼 수 있고 유년기로의 영혼의 여행에 있어서 어떤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을 원하면서 이 일기를 쓴다. 이것이 이 글을 쓰는 의도의 전부이다.'
나 자신과 세상을 향해 쓰는 굿모닝페이지는 어쩌면 영원한 유년기인 우리 마음에 대한 육아일기가 아닌가 한다. 어릴 때는 누군가의 누구가 되어 사랑하고 일하면 정체성이 생기고 완성된다고 믿었지만 물리적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을 때도 정체성은 다양한 층위를 이루면서 고민과 방황 속으로 인도하고, 그 안에서 우리를 성장시킨다. 마음이 쓸쓸하고 휑한 바람이 불 때, 그 언제라도 펼치면 곧바로 힘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 그럴 수 있도록 부디 생활이 강건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