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모닝페이지, <나는 똑똑해지고 십다>를 쓴 의식적인 이유는 어제 아침 일찍 서울행 KTX를 타야 했기 때문이었다.아침에 시간을 들여서 차분하게 글을 쓸 여유가 없을 것 같았고, 이동 중에 쓸 수도 있긴 하지만 모처럼 타는 기차 안에서의 시간을 일상의 연장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기차 안에서 빵과 커피로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11월 말의 창밖 풍경을 감상하고 강의 자료를 보는 일련의 즐거운 계획들을 오롯이 지켜내고 싶었다. 쓰다가 말았거나 다 썼지만 좀 더 손 보고 싶은 글, 생각이 무르익지 않았다 싶은 글들이 잠자고 있는 발효 숙성실인 서랍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수년 전에 써둔 독후감 <앨저넌에게 꽃을>이 보였고 특별한 의도 없이 그 글을 조금 수정해서 어제의 모닝페이지로 발행을 했다.
어제, 이화여자대학교 나노과학연구원 주최의 미술공모전 강의를 들으러 4년 만에 이화여대 교정에 갔다가 전 날 썼던 글 중 필사했던 대목이 그대로 내 마음의 목소리로 되살아났다.
'책을 들고 오가는 젊은 남녀학생들을 바라보거나, 그들이 교실에서 공부한 것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들이 캠퍼스 식당에 모여 책과 정치와 사상에 대해 토론할 때, 나도 커피를 마시면서 그들과 함께 얘기하고 싶다.
때때로 나는 주변의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인다. 그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지만 나도 학생인 척한다. 어리석은 생각 같지만 연구실에 속해 있는 이상 나도 이 대학의 일원이라는 느낌이 든다. 혼자만의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들이 토론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으면 몸 안에서 부글부글 열정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대학에 가서 사람들이 유익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듣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다.'
강의실까지 가는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10분가량 긴 줄을 서야 했고, 검은 패딩과 검은 배낭의 보호색 속에 나도 대학생처럼 줄을 서있었다. 학생들은 매일 반복되는 10분의 대기 시간이 지겨울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엄마뻘인 나, 이 강의를 듣기 위해 KTX를 타고 온 나, 강의 내용을 얼마나 이해할지, 희망을 안고 돌아갈지, 좌절감을 안고 돌아갈지 모르는 나, 이곳에 다시 오게 될지,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를 불확실한 상태의 나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조차 행복했다.
마침 회색빛 하늘에서 그런 나를 축복해 주는 눈이 내렸다. 서울에는 눈이 자주 내리는지 학생들은 저마다 귀에 헤드폰을 쓰고 있거나 자료를 보거나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지 누구도 눈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나는 고개를 들어 먼 산에 내리는 눈과 내 주변에 내리는 눈을 자세히 보았다. 두 번 다시는 못 볼, 단 한 번의 눈을.
내 뒤에 서있던 학생 둘이 하는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탕후루의 유래를 아니?"
"아니."
"원래는 지금 같이 여러 가지 과일로 만든 게 아니라 산사나무 열매로 만든 걸 탕후루라고 했대. 산사나무 열매가 몸에는 좋은데 먹기에 너무 써서 달콤한 설탕물을 발라서 먹었던 거지."
"근데 지금은 단 과일에 단 설탕물을...ㅎㅎㅎ."
올해 여름, 탕후루 소재로 스톱모션을 만든 적이 있었다. 그림으로 그리는 탕후루가 맛있어 보이도록 형태를 그리고 색깔을 고르는 것과 설탕 코팅을 진짜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투명 플라스틱 필름 재질로 제작을 하는 것이 이 컨텐츠의 포인트였다. 종이 스톱모션에서 필름 재질을 사용할 경우, 촬영 시에 빛이 반사가 되는 문제가 있어서 색감이 잘 나오도록 조명에 특별히 신경을 써야 했고 까다롭고 힘든 작업이었다. 기획단계에서 레퍼런스 자료를 수집할 때에도 시각적인 효과 위주로 수집했지 탕후루의 기원은 생각지도 못했다.스톱모션 제작자로서의 나에게 탕후루란 그런 기억으로 남아있고, 이곳 학문의 전당 학생에겐 탕후루의 유래가 재미있는 요소다.
끌어당김의 법칙에 대한 책 <여기가 끝이 아니다>를 쓴 작가, 린 그라본은 '물리학의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집중하는 것을 얻게 된다.'라고 말했다.
<양자와 예술>에 대한 강연은 호주 뉴 사우스 웨스트 예술 대학, 폴 토마스 명예 교수가 초청 연사로 이루어졌다.
이번 공모전은 고전 컴퓨터 데이터의 최소 단위인 비트를 넘어서서 양자 컴퓨터를 가능하게 하는 큐비트를 핵심 개념으로 잡고 전반적인 양자 물리학의 성질에 대한 이해를 다룬다.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를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형상으로 만들어내는 상상력과 표현력이 이 양자 미술 공모전으로 이끌어내고자 하는 주된 가치이다.
우연한 기회에 1회 양자나노과학미술대회에 참가했던 인연으로 2회 때도 자료를 받아볼 수 있었고, 3회인 지금 다시 한번 참여하게 되었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처음에 막연한 호기심으로 발을 들여놓으면서 어렵게만 느껴지던 양자 세계에도 오래 머무르다 보니 똑똑하게 이해를 잘하지는 못해도 감각적, 직관적으로 양자 세계가 무엇이고, 왜 관심을 가져야 하며, 어떻게 삶에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영감이 조금씩 생기는 것 같다.
양자 세계는 지금까지 경험한 거시 세계, 확정적인 세계와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에너지와 가능성의 세계관이다. 실체는 아니지만 실체가 될 수 있는 연관성과 가능성의 힘이다.
강연장에 들어가기 전에 이름과 소속을 써야했는데, 참석자들은 크게 두 부류로 보였다. 대학생과 일반인. 일반인은 대체로 미술 작가 같았다. 나도 뭔가 소속을 적어야 해서 작가라고 쓰긴 했지만, 나는 왜 거기에 갔나?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생각해 보았다. 나는 꼭 보이지 않는 양자 세계의 아름다움을 예술가적인 상상력과 표현력을 발휘해서 대중에게 보여주고 싶은 열망이 큰 것도 아니다.
어제 쓴 독후감, <앨저넌에게 꽃을>에서 똑똑해진 찰리가 대학교 캠퍼스에서 학생들 사이에서 느꼈던 감정, 똑똑한 젊은이들이 한치의 망설임과 버퍼링 없이 쏟아내는 양질의 질문들을 들으면서 내 안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열정을 느끼고 싶었던 것인지 모르겠다. 이 귀한 강의를 통해서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손상된 나의 일부분이 조금은 온전해지는 치유의 경험이었다.
모든 생명 속에서는 실현되기를 바라는 일부분이 있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되어가고, 번데기는 나비가 되어가고, 손상된 인간은 온전한 인간이 되어간다. 그것이 영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