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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정옥 Feb 16. 2024

1987 불란서 레스토랑


사실 이 글이 <건강할 결심>의 카테고리에 맞을지 아닐지는 다 써봐야 알 것 같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고강도의 몰입을 하느라 시간의 문 앞에 와 있기 때문에 막 떠오르는 이야기를 적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마 건강한 글이 될 것이다. <건강할 결심>에 쓸 이야기를 생각하다가 떠오른 이야기니까.


때는 바야흐로 일천구백팔십칠년, 그러니까 드라마 <응답하라 1988>과 비슷한 시대적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담임 선생님이 무용 선생님이라니! 무용 선생님 반만 안 되면 누구라도 괜찮다 할 만큼 무섭기로 악명 높은 선생님 반이 되고 말았고, 최악의 학기 초를 맞이했다.


담임 선생님 별명이 '각목'이라고해서 의아했는데 첫 만남에서 그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무용 선생님답게 뼈대가 느껴질 정도로 키가 크고 마른 체형에 자세가 어찌나 곧은지 꼭 막대기 같았다. 짧은 파마머리에 진분홍 립스틱을 바르셨고, 쌍꺼풀이 진 작고 동그란 눈은 놀란 토끼 같았다. 막대기 같은 꼿꼿한 체형에다 튀어나온 광대뼈와 사각턱의 강렬한 얼굴에 나쁜 소문이 덧칠해져서 첫인상은 '딱딱' 그 자체였다.


어찌어찌해서 학기 초를 보내면서 나는 부반장이 되었다. 반장 한 명에 부반장 두 명인 체제였다. 선생님께서 반장과 부반장으로 선발된 우리 세명을 특별히 초대하신 날의 기억이다. 장소는 남포동의 불란서 레스토랑. 그때까지 학교 밖에서 선생님을 만나본 적이 없었던 데다 시내 한복판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공포의 각목 선생님과의 만남이라니 기괴한 기분이었지만, 곧 이례적인 설렘으로 바뀌었다. 왜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레스토랑이 쉽게 갈 수 없는 최고급 레스토랑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세명은 만나서 같이 가기로 하고 남포동 극장 앞에서 만났다. 반장 현철이와 또 한 명의 부반장 윤원이는 레스토랑이라는 장소를 의식하고는 각각 와인색과 짙은 남색 골덴 재킷을 드레스코드로 입고 나왔다. 내 옷차림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들처럼 격식을 갖춘 복장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약간 의기소침해졌지만 곧 평정심을 회복했다. 부반장의 자격으로 당당하게 초대받은 손님이지 않은가?


선생님이 오시기 전에 먼저 도착한 우리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빨간 카펫이 깔린 어두컴컴한 실내에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하얗고 까만 투톤의 웨이터 복장을 한 직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예약된 자리에 앉았다. 다림질이 잘 된 흰색 천이 깔린 테이블과 의자가 무지 컸다. 자리에 앉아서 올려다보이는 샹들리에는 아르누보나 로코코 양식 그 어디맨가의 넝쿨 모양으로 압도적인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열다섯 살 인생에서 그동안 텔레비전이나 책에서만 본 정통 레스토랑을 직접 체험하고 있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선생님께서 예약해 놓으신 음식은 놀랍게도 메뉴 최상단에 위치한 풀코스였다. 그것의 세팅을 묘사하자면 가정 시간에 배웠던 그대로였다. 가운데 동그란 흰 접시 양쪽으로 역시 아르누보나 로코코 양식으로 추정되는 넝쿨 모양의 조각으로 장식된 은색 포크와 나이프들이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순서대로 줄을 지어 번쩍였다. 너무나 흥분되었으며 한편으로는 그런 대접을 받는 것이 얼떨떨했다. 그 이전까지 양식이라고는 동네 경양식 집에서 먹어본 돈까스가 다였다. 990 돈까스라고 당시에 유행하던 돈까스 집이 있었는데, 돈까스가 단돈 990원! 오뚜기 후추가 뿌려진 노란 크림 수프와 케첩이 뿌려진 잘게 썬 양배추까지 합쳐서 말이다!


테이블보와 같은 흰색 천으로 된 큰 냅킨을 들고 목에 둘러야 되는지 무릎에 올려야 되는지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갈등했다. 이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헷갈리는 문제이기에 이번 기회에 분명히 하기 위해서 찾아본 바로는, 어린 아이나 몸이 불편한 사람, 흔들리는 기차나 비행기 안에서는 목에 두를 수 있고, 그 외에는 무릎에 올리는 것이 맞다는 것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당시의 우리는 열다섯 살이었으니 어떻게 했어도 무방하지 않았나 싶다.


전체 요리로 붉은 야채 수프가 나왔다. 그 안에 처음 보는 서양 채소들이 자르지도 않고 통째로 들어있었다. 그때는 채소의 이름을 몰랐는데 지금 떠올려보니 아스파라거스, 컬리플라워, 비트, 베이비콘 정도가 될 것 같다. 농염한 빨강 수프 국물에 노랑, 주황, 초록, 보랏빛이 어울려 한 폭의 유화같이 아름다웠다. 맛은 시큼한 것이 입에 맞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깜짝 놀랐다. 너무 맛이 없어서. 감동적인 비주얼처럼 맛도 뭔가 고급스러운 구라파풍의 향신료 맛을 기대했는데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곧 입장을 정리했다. 이렇게 고급진 불란서 레스토랑에서 쉰 음식을 제공했을 리는 없을 것이고, 레스토랑과 선생님의 취향을 존중하기.


빵은 손으로 떼어먹는다고 배웠던 것을 기억해 내어 포크와 나이프를 쓰지 않았다. 이 문제는 가정 시험에 빈번하게 출제되면서도 많은 아이들이 늘 잘 틀리는 문제였다. 메인 요리인 스테이크를 자를 땐 칼질이 서툴러서 고기가 접시 밖으로 튀어나가지는 않을까 잔뜩 긴장을 한 채 써는데만 온 신경을 집중했으므로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내 인생에 특별한 한 끼의 식사가 끝났다.


식사를 마치고 선생님 댁에 갔다. 선생님께서 옻칠이 된 팔각 나무 찻상에 차마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색깔의 약식과 동그랗고 오목한 청자 찻에 광채가 나도록 노란 유자차를 내오셨다. 아주 곱게 채 썰어진 유자가 찻잔의 절반이나 들어있었고, 차를 마시고 숟가락으로 떠먹었던 유자 과육이 어찌나 부드럽고 달콤했던지 그 이후로 지금껏 그만큼 맛있는 유자차는 만나지 못했다.


레스토랑에서도, 선생님 댁에서도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학급 임원이 되었으니 열심히 하라는 격려의 말씀을 하셨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오직 기억에 남는 것은 휘황찬란했던 테이블 세팅과 영광스러운 붉은 카펫과 압도적인 샹들리에, 격조 높은 클래식 음악이 흘렀던 남포동의 불란서 레스토랑이다.


성냥불 속에서 보이는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크리스마스트리의 환상이 성냥팔이 소녀의 추위와 배고픔을 달래주었듯이 그 옛날 그 장소의 분위기와 색깔, 냄새, 맛, 온기는 세월을 통과해서 온몸을 마법처럼 휘감는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나 싶은 얼떨떨함 속에서 존중받고 있는 행복감과 나에게 그토록 극진한 대접을 해주셨던 엄마 같은 선생님은 더 이상 '딱딱'한 각목이 아니라 유자처럼 둥근 얼굴로 기억된다. 1987 불란서 레스토랑은 따뜻한 환상으로 되살아나 밥을 많이 먹었는대도 왠지 헛헛한 속을 덥혀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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