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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Feb 12. 2024

안 되는 상태를 위한 작은 단서들

-조르조 아감벤 <행간>


정오의 악령

| 해태혼침


나태한 인간의 시선이 집요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창가에 머문다. 그는 누가 찾아오는 장면을 떠올린다. 문이 조금만 삐걱거려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또 무슨 소리가 나는지 확인하기 위해 창가로 달려가 밖을 내다본다. 하지만 길가로 나서는 대신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원래의 자리로 무기력하게 돌아와 앉는다. 책을 읽다가도 불안한 마음에 독서를 중단하고 1분이 채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진다. 손으로 얼굴을 비빈 뒤에 손가락을 펴고 눈을 들어 시선을 벽에 고정시킨다. 그러다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다. 모든 말들의 마지막 음절을 더듬거리면서 몇 줄 더 읽어 내려간다. 그러는 사이에 쓸모없는 계산으로 머릿속을 채우면서 책과 공책의 페이지 수를 세기 시작한다. 글자와 눈앞에 있는 멋진 세밀화들이 미워지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덮어버린 책을 베개 삼아 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그리고 무언가를 빼앗겼다는 느낌이, 배가 고파서 무언가를 먹어야겠다는 느낌이 그를 잠에서 깨어나게 만든다.


해태혼침의 이 기막힌 묘사는 Santi Nill, <여덟 가지 질병에 관하여>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저서 <행간>에서 재인용)에 실린 글이다.

중세의 교부들은 나태, 슬픔, 의욕상실, 게으름 등 영적 삶을 방해하는 상태에 정오의 악령이라 부르며, 페스트보다 더 무서운 재앙으로 여겼고, 어떤 식으로든 용서가 되지 않는 유일한 악덕으로 분류하면서 특별한 열정을 가지고 맞서 싸웠다고 한다.



해태혼침에 대한 <청정도론>의 설명으로는,

해태(懈怠, 티나)는 마음이 뻣뻣해지고 굳는 현상 즉, 나태함을 뜻한다.

피로하여 분발심이 없고, 무력하고 활기가 없는 상태는 정진을 방해한다.

혼침(昏沈, 밋다)은 마음이 무겁고 게으른 상태, 무기력함을 나타낸다.

지혜 없는 마음의 잡음이 졸음과 권태로 이어지며 일이 지겨워지고 처진다.


부처님은, 폭식을 하면 마치 힘센 코끼리에 짓눌리듯이 해태혼침으로부터 공격을 받으므로 과식을 주의하며, 과식이 일으키는 해태혼침을 알아차리라고 하셨다.

또, '자세를 바꾸라.', '빛을 바라보라.', '찬물로 눈을 씻어라.', '야외에 나가라.', '동정심 있는 도반과 교제하라.' 그리하여 '해태혼침을 물리치는데 도움이 되는 격려의 말을 나누라.' 등의 해태혼침을 없애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친절하게 가르쳐 주셨다.


청정도론 아비담마 | 유튜브 채널 <제따나와 선원> 일묵스님 법문


게으름은 영혼의 적이다

성 베네딕토 수도 규칙이다.

게으름은 죄이며 모든 덕행의 결여를 초래한다.


일해야 된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법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법이다

인간의 일의 의무는 창세기에 명시되어 있는 하느님의 법이다.

하느님은 불완전하게 창조된 인간에게 스스로 선택하고 노력해서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는 일할 능력을 부여했다.



7대 죄악 (Seven Deadly Sins)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식탐, 음욕의 일곱 가지 근원적인 개념은 6세기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주님, 구원받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잡다한 생각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무엇을 해야 합니까?
저는 수도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전혀 하지 않고
게으름에 젖어 먹고 마시고 잘 뿐이며,
끊임없이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옮겨 다닐 뿐입니다.

중세의 교부들은 나태한 자를, 곧 내면의 유령이 끊임없이 뱉어내는 생각들을 조절하지 못하는 자로 보았다. 중세에는 생각이라는 말이 항상 상상이나 환상과 연관되어 사용되었고 '분리된 지성'이라는 그리스적. 중세적 개념이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지적 활동'이라는 뜻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나태'를 우울증이라는 신드롬 그리고 심신증의 원인이 되는 상사병과 하나로 묶어주는 특징들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상상력의 팽창이었다. 우울증이나 상사병처럼 나태도 삐뚤어진 상상력의 오류로 정의될 수 있다. 우울증이나 병 혹은 마약에 시달리면서 이러한 상상의 무질서함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러한 내면적 이미지의 절제할 수 없는 흐름이 의식적 차원에서 가장 통과하기 힘들고 위험한 시험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해태혼침과 나태를 몰고 오는 정오의 악령과 맞서 싸우기 위해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들을 기억하고, 나만의 무기를 준비하자.



이 레몬을 너에게


slow motion 지루한 여름과

긴 한숨 긴 하품 긴 하루

something cool 너의 졸린 눈에

새파란 새 파도 새 바람을

쓰디쓴 잠의 소금기

건조한 눈을 씻어 줄

이 레몬을 너에게



W - Lemon (feat. 민경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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