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정옥 Feb 19. 2024

감각의 창문 닦기

-feat. 유리 닦기 필살기


호텔에서 일할 때의 이야기다. 한 달에 한번 로테이션으로 층을 바꾸었고, 메이드들은 월말이 되면 로테이션 준비로 바빠졌다. 자기가 일하던 층에 오는 다른 동료에게 인수인계 해주어야 할 요소들을 점하는데, 이때 메이드들이 가장 부담스러워했던 것은 유리창 닦기였다.


매번 룸 정비를 할 때 꼭 해야 하는 동선대로만 해도 늘 시간이 빠듯할 정도로 스캐쥴이 잡히기 때문에 일상적인 정비 시간에는 유리까지 닦을 수가 없었다. 눈에 띌 정도의 얼룩 정도만 빠르게 처리하고 유리는 한 달에 한번, 월말 로테이션 준비로 닦는 것이 정례였다.


월말이 되면 매일 스캐쥴에 유리 닦을 방을 몇 개씩 정해서 나누어 넣는다든가, 아침에 조금 일찍 와서 닦는다든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각자 알아서 한 층의 유리 전체를 닦아야 했다. 유리 닦는 주간이 다가오면 복도를 오가며 하는 인사가 "유리 닦았어?"였고, 아침저녁으로 스테이션에 모이면 유리 닦기용 극세사 걸레에 대한 최신 정보가 오가곤 했다.


처음에는 한 층에 있는 룸 수십 개의 유리를 닦는다는 사실은 믿기 힘든 압도적인 중압감이었다.

마치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워 넣 콩쥐의 심정이랄까? 망연자실해서 넋을 놓고 커다란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망망대해가 막막하게 펼쳐졌다. 파도소리조차 구슬픈 아리아로 들렸다. 이럴 때는 일단 '그냥 해보는 수밖에 없다'는 단순한 의지로 시작하는 것이 제일이었다.


서툴지만 주어진 도구들을 사용해서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불쑥 밑 빠진 독을 막아주는 두꺼비처럼 선배가 나타나곤 했다. 그때 나타나는 선배는 나에게 꼭 필요한 필살기를 가지고 있었다.


'칙칙!' 유리 닦는 세정제를 뿌리고는 막대 달린 유리걸레로 유리를 닦고 있는데, 누군가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야! 그렇게 해가지고 백날해도 안돼. 팔 아파서 내일 일 못해. 나와봐."

뒤를 돌아보자 귀신같이 유리를 잘 닦는다고 소문난 가 서 있었다.

"이거 영업 비밀인데 너한테만 알려주는 거니까, 다른 사람한테 절대 가르쳐주지 마! 알겠지?"


이곳의 선배들은 남들보다 월등히 빠르고 잘하는 분야가 있어도 묻지 않고 가르쳐 주지 않았고, 그 사실이 암묵적으로 공공연히 인정되었다. 그야말로 영업 비밀이었다. 똑같이 지급되는 월급이 아니라, 기본급에 정비한 룸 타입이나 개수, 기타 엑스트라가 추가되어서 같은 시간 일하고도 받는 급여가 기하급수적으로 차이가 났기 때문에 이 같은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니 같이 손발 맞춰서 시너지가 나고 자기에게 도움이 될 만하다고 판단될 때만 힘들게 배운 팁을 공유하는 식이었다.


"당연하죠."

내가 걸어가야 할 고생길 앞에 좋은 방법을 들고 나타난 선배 앞에서 절로 굽신거려졌다.

선배가 알려준 방법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내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유리 닦기 신공은 다음과 같다.


첫째. 커다란 양동이에 뜨거운 물을 받는다.

둘째. 거기에 유리 세정제를 뿌리는 정도가 아니라 뚜껑을 열고 콸콸콸 들이붓는다.

셋째. 막대가 달린 유리 걸레를 그 물에 적셔서 닦는데, 위에서 아래로 닦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즉 가로로 닦는다.

넷째, 유리 걸레의 스펀지 부분의 물기를 꼭 짠다.

다섯째. 뒤에 달린 고무 부분을 사용해서 물기를 긁어내면 끝이다.


뜨거운 물이야말로 신의 한 수였으며, 뜨거운 물이 식기 전에 빠르게 해야 한다. 가로로 닦으면 세로에 비해 움직이는 횟수가 줄었다.

선배의 손길이 지나가는 곳은 유리가 사라진 것 같았다. 눈앞에서 유리겔라가 숟가락을 휘는 마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깨끗하게 닦아진 유리 너머로 바라다보이는 바다는 한층 더 파랗고 가까워졌고, 구슬픈 아리아로 들리던 파도소리는 위풍당당 행진곡으로 바뀌었다. 선배는 누구나 하는 방법의 고충을 해결하게 위해 충격적인 다름을 시도한 것이었다. 선배가 알려준 방법으로 막막하던 유리 닦기는 필살기가 되었고, 월말만 다가오면 거대한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처럼 두렵던 로테이션 준비도 일상적인 공기가 되었다.


나는 그 선배를 유리의 신으로 추종했다. 충성을 다해 리스펙을 하자 더 많은 필살기를 선보였다. 1년 동안 나는 차마 여기에서 다 풀 수 없는 놀라운 청소 신공들을 전수받았다.

유리의 신에게 배운 유리 닦기 신공은 이후에 이어진 게스트하우스 아르바이트에서도 사람들이 신기해하는 특별한 재주로 인정받았다. 다른 직원들은 기피하는 유리 닦기를 자청함으로써 나중에는 유리만 닦는 특혜를 받기도 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도 그때 그 선배처럼 후배들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야! 그래가지고 언제 다할 거야. 나와봐."

내가 나서서  유리를 한번 닦아주거나 베드메이킹을 해주면 아이들은 굽신거리며 고마워했다.

"벌써 다했어?"

"어, 오늘 언니가 도와줘서 빨리 끝났어."

복도를 지날 때면 룸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곤 했고, 보람찬 일터가 되어갔다.


한 명은 인도네시아에서 온 친구였는데, 컴퓨터그래픽을 공부하면서 영어 과외로 돈을 버는 것이 플랜이었는데, 그게 계획대로 안되어서 플랜 B로 청소 알바를 한다고 했다. 나중에 친해져서 일 마치고 근처 카페에서 영어 수업을 받았다. 그 친구에게 내가 다니고 있는 피아노 학원의 단체 영어 수업을 소개해주어서 그 친구는 청소 알바를 그만두게 되었다.

또 한 명의 후배는 저녁에 하는 공부모임에 와서 같이 책 읽고 글 쓰는 도반이 되었다.


행복 게스트하우스


우리의 몸은 하나의 집이다. 몸은 보고, 듣고, 냄새 맡는 수많은 감각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이 사는 집은 방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창문과 굴뚝과 배수구가 있어야 한다.

창문으로 환기를 하고 바깥 풍경을 본다. 굴뚝으로 연기가 빠져나간다. 배수구로 오염수가 빠져나간다.


창문을 닦지 않으면 바깥세상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희뿌연 창문 밖으로 무언가 움직인다.

누가 왔나 하고 문을 열어본다.

바람에 나무가 흔들릴 뿐이다.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뭔가 발에 걸린다. 

마트 전단지다. 모든 생필품이 1+1이라니! 축제다.

그 전단지에는 마침 필요했던 것들이 모두 다 들어있다.

살 것의 리스트를 적는다.

마트 투어를 오늘의 To do list에 추가한다.

그전에 뭘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린다.

창문 밖에 흔들리는 나무가 신경이 쓰여서 아예 두꺼운 커튼을 친다.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안 간다.

특별히 한 일도 없는데 갑자기 졸린다.

'수면은 피로한 마음에 가장 좋은 약이다'라는 세르반테스의 말을 떠올리며 낮잠을 잔다.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고는 미라클 모닝을 검색한다.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책을 읽고 자수성가한 이야기에 열광한다.

<미라클 모닝>, <아침 글쓰기의 힘>,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책을 대거 구매한다.

책이 도착하면 모든 것이 될 거라는 확언을 말하고는 잠이 든다.


감각의 창문을 깨끗하게 닦을 때 세상의 유용한 정보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엘가 - 위풍당당 행진곡 1번 D장조, Land of Hope and Glory, 희망과 영광의 땅

https://www.youtube.com/watch?v=V6c0zwVv9Tg



연재 중인 브런치북입니다.


+ 일요일과 목요일 -<길모퉁이 글쓰기 카페>

+ 화요일과 토요일 -<읽기의 천사>

+ 월요일과 금요일 -<건강할 결심>

+ 수요일과 토요일 -<오랜일기>

이전 09화 1987 불란서 레스토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