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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Feb 23. 2024

지적질의 불화살



'지금 이 순간만이 실재다.

과거는 지나갔으니 실체가 없고,

다가올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없다.' 


말이야 근사하게 할 수 있지만 어디 그런가!

그럴듯한 저 말은 생각일 뿐, 감정은 시시각각 지나간 과거에 대한 괴로움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소중하고 유일한 지금 여기의 실재를 허비하며 산다.

말이 지나간 후에도 그 말의 여운이 몸 곳곳에 남아서 정신을 교란시킨다.


어제 들은 어떤 말이 생각보다 긴 여운을 남기며 마음의 창공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내가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인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해준 말이었다.

오래전부터 개인 홈페이지부터 시작해서 소소한 생활 글쓰기를 꾸준히 해와서 주변 사람들은 내가 그냥 늘 글을 쓰는 사람 정도로 알고 있다.


말을 전해준 사람이 전한 지인의 말은 내가

"옛날에는 글을 잘 썼는데, 왜 이렇게 못쓰게 됐냐"

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설명은 없고 딱 그 한 문장이라 어떤 면이 그렇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랬다.

그 사람도 말을 해놓고는 후회가 됐는지, 이번 책이 진짜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고민 끝에  말이라는 사족을 구구절절 달았다.


순간, 팍! 기분이 상했고, 그 감정은 곧 몸으로 침투해서 가슴이 답답하고 속에서 불덩이 같은 것이 부글거렸다. 내 글에 대해 그런 평가를 했다는 사람도, 그 말을 전달한 사람도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 타오르는 불을 꺼뜨리고, 심호흡을 한 후에 '말해줘서 고맙다'라고 했다. 그 말 밖에 더 할 말이 없었다. 더 잘 쓰겠다는 말 밖에...

카페를 나와서 우리는 "파이팅!"을 외치며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서 늦은 시간까지 번뇌에 휩싸였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가 어떻게 안다고 함부로 잘니 못쓰니 지적질이야?"

천둥번개가 치고, 폭풍우가 지나가고, 산과 댐이 무너지고 강과 바다가 범람했다.

비가 그치고, 해가 솟고, 무지개가 떠올랐다.

감정의 기상현상이 한 싸이클을 그리면서 지나갔다.


그러고 나자 정말로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사회적 동물로서 의례히 해야 할 인사로서의 말로만, 생각으로만이 아니라 진실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일어났다. 삶은 삶이고, 글감은 글감이고, 글은 글이었다.

글로써 세상에 나아가고자 한다면 글을 잘 써야 한다는 단순하고 청량한 답이 비그친 처마 밑에서 한 방울 똑! 떨어졌다.


그 사람이 옛날에 더 잘 썼다고 하는 내 글과 지금 더 못 쓴다고 하는 내 글에 대해 나는 그 이유와 원인, 나아갈 방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올라왔다.

잘 썼던 나도, 못썼던 나도, 잘 살았던 나도, 못 살았던 나도, 칭찬받았던 나도, 비난받았던 나도 다 나다. 이게 나인걸...


잘 쓴 글, 못 쓴 글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들이 보는 입장에 대해서도, 내가 글을 쓰는 마음가짐에 대해서도 많은 요소들을 다 각도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자신 조차도 기억하지 못하는 잘 썼던 내 글을 기억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무한한 감사가 차고 올라 넘쳐흘렀다.

뭐가 됐든  잘 써서 그 애정어린 관심에 보답하리라! 결의가 솟아올랐다.



곧, 예전에 유리드미를 할 때의 경험이 연결되었다.

지도하시는 선생님들은 유리드미를 전혀 안 해본 사람들을 데려다 놓고 우리가 하는 동작에 대해 지적을 하라고 시키셨다. 관중으로 초대받은 사람들도 막상 코멘트하기가 무안해서 주저하며 서로 간에 눈치를 보느라 불편한 시간이 흘렀다.


지도하시는 선생님들은

"어떤 것이든 말씀을 해주셔서 이분들이 나아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고 다시 한번 정중하게 요청했다.

유리드미를 전혀 안 해본 사람들은 그야말로 본 대로, 느낌대로 지적하기 시작했다.


"저... 제가 잘은 모르지만, 혹시 도움이 될까 하고 한 말씀드리자면... 시선이 불안해 보이는 것 같아요."

군중 속에서 한 사람이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다른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좀 더 자신감 있게 했으면 좋겠어요. 동작이 자신의 중심에 있지 않고 외워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요."

목소리들이 이어졌다.

"하는 사람이 불안해 보이니까 보는 사람도 즐기지 못하고 틀릴까 봐 조마조마해요."

이쯤 되니까 '손가락이 여섯 개처럼 보인다.'는 둥 '뒤뚱거리는 것 같다.'는 둥, '머리가 가만히 있지 않고 흔들린다'는 둥, '허리가 구부정해 보인다'는 둥, 이건 인신공격이 아닌가 할 정도의 수위 높은 비평의 화살이 쏟아졌다. 우리는 온몸으로 말의 화살을 맞으며 버티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 그렇게 표현한 의도는 어쩌고 저쩌고..."

"모르시는 말씀인데, 그건 왜 그런고 하니..."

변명을 주구장창 늘어놓고 싶었다. 나중에는

" 나와서 한번 해봐라!"

며 소리치고도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중한 태도로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이렇게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속에 서 있으면서 말이 지나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그런 지적의 시간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이 없었고, 스스로 소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했으므로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냥 좋아서 시작했고, 즐기고 싶은데,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나?"

하고는 옷을 벗어던지고 그만두는 사람도 나왔다.


남아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다시 유리드미를 하기 위해서는 불쾌한 비평의 말을 수용해서 연습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감정에서 벗어나는 길은 연습밖에 없었다.

연습으로 땀을 흘려서 몸에 들러붙은 말의 각질을 떨쳐내는 것, 더 잘하고, 더 커지고, 더 넓어진 내가 되는 것 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것을 계속하겠다는 나의 이유만이 모든 시험에서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처음에 지적을 받을 때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될지 모를 정도로 좌불안석하고 분노와 수치심이 불 같이 치솟았지만, 그것도 자꾸 반복하니까 웬만한 욕을 들어도 그러려니 했다. 지적하는 사람이 별 할 말이 없어서 막 던지는 말과 진실로 도움이 되는 후킹한 지적이 구분되기도 했다.



유리드미를 떠나서, 인생에 있어서 고마웠던 사람들을 돌이켜 보면 젊었을 때와 지금은 좀 다르다.

젊었을 때는 나를 좋아하고 칭찬해 주는 말들에 이끌렸다. 그 말 한마디에 전 존재를 던져 무모에 가까운 용기를 냈다.

지금 떠오르는 고마운 사람들은 아프도록 모진 말을 해준 사람들이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만큼 모욕적인 말을 해준 사람 덕분에 보기 힘든 나의 그림자를 대면할 수 있었다.


이제 유리드미도, 글도, 인생도 지도해 주시는 선생님이 안 계신다.

단단한 아집으로 똘똘 뭉친 완고한 노인으로 늙어갈 것인가, 수용하고 고치고 변화하는 성숙한 작가로 다시 태어날 것인가,

두 세계의 갈림길에 섰다.


"어떤 것이든 말씀을 해주셔서 제가 나아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십시오."

 스스로 나의 지도 교사가 되어서 관객들에게 정중하게 요청드린다.

세상에 필요한 일꾼이 되기 위해서, 칭찬이 아닌 막말의 불화살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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