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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Apr 04. 2024

블루베리 빵


자주 가는 집 근처 24시간 무인카페에서 많은 글감이 생기곤 하는데, 또 한 번 글로 쓰지 않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생겼다.

내 앞자리에 할머니 한분이 공부를 하고 계셨다. 할머니가 보고 계신 회색의 시험지에는 굵은 명조체로 국어라고 찍혀 있었고, 할머니는 작은 소리로 지문을 읽으면서 공부를 하셔서 조금 방해가 되었지만, 허연 머리의 어르신이 검정고시를 준비하시는 듯한 모습에 흥미가 갔다.


전화벨 소리가 울렸고, 할머니의 통화가 시작되었다.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고 하는 통화는 길어졌고, 나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새 책을 덮고 듣기 평가를 하듯이 집중해서 통화 내용을 엿듣고 있었다. 할아버지의 폭언과 폭행에 도망쳐 나와서 카페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줄거리의 꽤 구체적이고 긴 통화가 이어졌다. 전화를 끊은 할머니는 뒤를 돌아보더니 '시끄럽게 해서 미안하다. 이제 조용히 하겠다'며 고개까지 푹 숙이는 것이 아닌가. 평소 같으면 무심히 고개를 주억이고 말았을 테지만 놀라운 통화 내용과 너무 깍듯한 인사에 나도 모르게 한마디 건네게 되었다. 


"괜찮습니다. 시험 준비하시나 봐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가난하고 여자라서 공부를 안 시켜줘서 학교 문 앞도 못 가본 것이 한이 되어서 이제라도 공부를 한다며, 내일모레가 초등 검정고시 시험일이다부터 시작해서, 자식들은 모두 자신이 힘들게 일해서 대학을 보냈고, 딸들은 서울에 시집가서 다 잘 산다. 남편은 어느 대기업에 다녔는데 평생 바람을 피우고 밖으로 돌아다니다가 늙어서 병이 들어서는 집에 들어앉아서 반찬 투정을 하고, 의처증이 생겨서 공부하러 가는 할머니가 남자가 생겨서 매일 나간다며 폭행을 한다고 했다.

"시험 준비하시나 봐요."

한 마디 했을 뿐인데, 할머니의 전 생애를 다 털어놓으셨다.


뭐라고 할 말도 없고 해서 그래도 검정고시를 준비하시고 대단하다고 하자마자 또 공부에 대한 이야기를 버퍼링 없이 쏟아내셨다. 친구들은 노래 부르고 춤추러 다니면서 같이 가자고 하지만, 자신은 그런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공부하는 게 제일 재미있다면서, 어려워도 영어 배우는 것도 재미있고, 젊은 사람들과 공부하는 게 행복하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할머니의 눈이 처음으로 반짝였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 인사말처럼 대학까지 공부하시라고 했더니, 내일모레가 80이라 대학 까지는 그렇고, 중학교까지 공부하는 게 꿈이라고 분명한 목표까지 말씀해 주셨다.


할머니가 잠깐 나가시고 나서 책을 보려고 하다가 들어오시면 또 말을 하실 것 같아서 오시기 전에 가려고 서둘러 짐을 챙기고 있었다. 다시 들어온 할머니는 숨을 헐떡이면서 일회용 비닐장갑을 내밀었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할머니 자신도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더니 밖에 나가서 사 온 빵을 절반 뚝 떼어서 나에게 들이밀었다. 지금 바로 나온 빵인데, 이 집 빵이 진짜 맛있다면서. 할머니가 손으로 떼어낸 빵에서 블루베리 잼이 뚝! 떨어졌다. 괜찮다거나, 여기 외부음식 반입 금지라거나 하는 말을 할 틈도 없이 비닐장갑을 끼고 잼이 더 떨어지기 전에 빵을 입으로 가져갔다. 금방 나온 빵이라 따뜻했지만 맛을 느낄 겨를도 없이 욱여넣었다. 그렇게 생전 처음 보는 할머니와 비닐장갑을 낀 채 허겁지겁 빵을 먹었다. 빵을 다 먹고 가려고 인사를 하자, 할머니는 또 긴긴 인사를 하셨다.

오늘 자신의 말을 들어줘서 정말 고맙다며, 정신이 나간 늙은이가 아무 말이나 한다고 생각해도 좋다, 자식들이 다 멀리 있어서 말할 사람도 없고, 딸처럼 생각하고 말했다며 미소를 지으셨다. 


벚꽃이 활짝 핀 봄길을 걸으며 콤플렉스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콤플렉스라는 단어는 마음속의 깊은 응어리, 열등감, 상처를 의미하지만, 심리학적으로 콤플렉스는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무의식의 어떤 힘을 뜻한다.

콤플렉스 이론은 과학적으로 검증하기 어렵기 때문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삶 속에서 공감한 사람들에 의해서 인간 심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져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고 주목받고 있다.

무의식에 깊이 잠재된 콤플렉스를 인정하고 수용하고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보다 온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콤플렉스와의 대면, 자신의 결핍을 마주하는 용기로 자기다움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다. 


공용 공간에서 큰 소리로 오랫동안 통화를 해서 나를 화나게 했던 할머니, 처음 보는 그 할머니가

속사포로 쏟아낸 인생 이야기, 비닐장갑을 끼고 블루베리 빵을 나눠 먹은 특별한 점심을 생각한다.

남편의 폭행에 도망쳐 나와 카페에서 초등 검정고시를 공부하는 80 할머니가 자신의 꿈대로 중학교 공부까지 마치시기를 바란다. 무엇보다 평온하기를 바란다.





연재 중인 브런치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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