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다가 발도르프 교사교육을 받을 때의 일화가 떠올랐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미술 교육을 가르치시는 마틴 선생님 시간이었고, 그날은 사각 크레용으로 풍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원기둥 형태로 된 크레용만 사용해 본 사람들은 사각 크레용 사용에 익숙하지 못해서 힘들어했다.
사각 크레용의 직육면체 한 면의 전체가 도화지에 밀착이 되어야 깨끗하게 그려지는데, 처음 사용하는 경우, 손에 들어가는 힘이 균일하지 않아서 면으로 칠해지지 않고 선으로 그려져서 마음먹은 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쉬울 것 같았던 게 마음대로 안되자 사람들은 당황하기도 하고 제대로 그려보려고 애를 쓰다 보니 속도도 느렸다.
나는 유치원에서 아이들과 사각 크레용으로 그림을 많이 그려봐서 익숙해져 있었고, 따라서 그 수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눈에 띄게 잘 그리고 있었다.
게다가 나는 당시에 그림으로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고, 마틴 선생님은 논문 지도 교수이기도 해서 그림 그리는 시간이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약간 들뜬 기분이었다.
쓱쓱 잘 그려지는 사각 크레용의 질감을 느끼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빠르게 그림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마틴 선생님은 책상 사이를 천천히 걸어 다니시면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가끔 멈춰 섰다. 그러다가 내 자리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셨다. 다른 사람들은 반도 안 그린 상태에서 거의 완성을 한 나는 선생님이 칭찬을 해 주실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으쓱한 기분으로 선생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너는 많이 그려봤구나."
그 말을 듣고 나는 왠지 실망스러웠다.
무슨 말씀을 기대했던 걸까?
그 순간의 나는 유치원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교육을 받고 있는 교사가 아니라 진짜 유치원생이 되어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싶었던 것이었다. 부끄러운 생각이 밀려왔다.
다음 날, 마틴 선생님은 미술 이론 수업에서 한번 더 확실하게 설명해 주셨다.
무언가 잘하는 아이에게 칭찬을 해주고, 못하는 아이는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잘하는 아이는 왜 잘하는지를 생각해 보고, 못하는 아이는 왜 못하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하셨다. 그것이 교사가 할 일이라고 말이다.
이후에 논문 발표를 했을 때도 칭찬은 해주지 않으셨다. 대신 '느낌이 좋다'. '계속 하라'고 하셨다.
지금의 나는 아이들을 만나지 않는다. 그 귀한 배움들을 기억하면서 내 작업을 하고 있다.
잘 된다고 좋아하고 낙관하지 않고, 잘 안된다고 절망하고 비관하지 않고, 왜 잘 되는지, 왜 안 되는지 생각해 본다. 이것이 나를 사랑하고 성장시키는 자기 교육이라고 믿으며.
좋은 느낌을 믿고, 계속 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