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내 꿈에 나온 다이노소어
우우- 우우후후후후~ 우우후후후후~
악동뮤지션의 신선한 노래, '다이노소어'를 듣다가 내 인생의 아픈 공룡이 생각났다.
페인팅으로 논문을 준비하면서, 처음에는 앞선 의욕으로 스무명의 아이 모두를 관찰했다. 그러다 한 명의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김준호(가명). 6세 남아. 아침 등원부터 저녁 하원 까지 끊임없이 말하고 뛰어 다님. 교사의 개입 없이는 손과 발과 입이 가만히 있지 못함. 식사 시간, 낮잠 시간, 대부분의 일과에서 선생님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아이. 4세 때 부터 2년 간 유치원에서 함께 생활했으며 그 전에 다니던 곳에서 이미 한글을 익힌 상태. 본인이 좋아하는 활동을 하거나 흥미 있는 주제, 물건에 대한 애착이 커서 집중력이 뛰어나고, 언어 사용이나 기억력이 뛰어난 것으로 관찰됨
소방차
은후 생일 카드 그림을 그리는 날이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신나게 드로잉을 했다. 준호는 종이 귀퉁이를 잡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준호야, 은후가 좋아하는게 뭘까?"
"소방차!"
"그럼, 소방차 그려줄까?"
"... ..."
"소방차 말고 은후가 좋아하는 게 또 뭐 있을까?"
갑자기 듣고 있던 은후가 끼어들었다.
"나 아이스크림 좋아해. 아이스크림 그려줘."
"그래, 은후한테 아이스크림 그려주자."
"... ..."
은후와 내가 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잠시 후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준호의 눈에서 소낙비처럼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떨군채 준호는 모기같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아무 것도 못 그려요."
놀란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당황해서 머뭇거렸다. 그때 준호가 울부짖으며 말했다.
"나는 낙서밖에 못 그린단 말이에요!"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옆에 앉아서 그림을 그리고 있던 현민이가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그려줄까?"
준호는 눈물을 그렁인채 현민이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뭐 그려줄까? 아무거나 말해."
그림을 잘 그리는 현민이가 자신있게 말했다.
"응... ... 소방차!"
"좋아!"
현민이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손을 움직여 쓱쓱 그림을 그렸고, 준호는 현민이의 손이 지나가는 종이 위에 나타나는 소방차를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준호는 현민이가 그려준 그림을 들고와서 기분 좋게 설명했다.
"선생님, 이건 견인차예요. 소방차지만 이 차가 이 차를 끌고 갈 수도 있어요."
"그래? 정말 멋지다!"
무지개
잘 그리든 못 그리든 자신있게 쓱쓱 그리는 모습에서 건강함이 느껴지는데 비해 준호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그림을 그리려고 앉으면 갑자기 주눅이 잔뜩 든 모습으로 고개부터 숙였다. 그러다 겨우 회색이나 갈색 크레용을 집어 들고는 종이 한 구석에다 아주 힘없는 가는 선을 슬슬 그었다.
한 날은 무지개를 그리는 친구 그림을 부러운 듯이 보고 있었다.나는 그런 준호를 보고 있었다. 준호는 나에게 다가와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무지개를 그리고 싶은데 나는 못 그려요."
빨강색 크레용을 잡은 준호의 손을 잡고 빨강부터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보라 하나씩 같이 그려주었다. 이 날 이후로 준호는 그림 그리는 시간이 되면 가만히 앉아있는 대신에 무지개를 그렸다. 반복해서 그리는 준호의 무지개는 나날이 둥글고 꽉차고 예뻐졌고, 어린 동생들도, 선생님들도 준호를 따라 무지개를 그리기 시작했고, 유치원 전체로 무지개 그림이 퍼져 나갔다. 준호의 마음에도 뭔지 모를 회색 먹구름이 걷히고 밝고 맑은 무지개 빛이 번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스마일
"나는 아무 것도 못 그려요!"
준호의 용기있는 자기 고백 이후, 집중적인 관심을 갖고 지켜본 준호는 조금만 신경을 써주면 금방 흥미를 갖고 즐거워했다.
한 날은 페인팅을 하는데 빨강과 노랑으로 주황을 만들고, 파랑을 찍은 붓을 종이 위로 가져가다가 붓에 뭍은 짙은 파랑 한 방울이 주황 위에 뚝! 떨어졌다. 순간, 준호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이 얼굴이 빨개져서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나보다 더 빨리 생각해낸 준호는 멈추어 있던 붓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실수로 떨어뜨린 파란 점 옆에 똑같은 파란 점 하나를 더 찍더니 그 아래에 반원을 시원하게 그렸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생님, 스마일이에요. 스마일! 이 그림 엄마 보여 줄래요!"
"야! 진짜 스마일이네. 너무 멋지다."
실수를 작품으로 만들어낸 자신의 기지에 만족하고 자신감을 얻은 준호는 붓을 내려놓고 자유놀이의 세계로 나아갔다.
준호의 그림이 좋아지고 밝게 지내는 모습을 보자 내 마음도 좋아졌다.
준호는 이제 거칠 것이 없었다. 아파트, 헬리콥터, 호랑이, 공룡, 생각하는 뭐든지 그려냈고, 그림을 그리면 늘 나에게 들고와서는 자랑스럽게 설명했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그림은 꼭 엄마에게 보여주겠다고 했다. 준호가 그린 공룡은 정말 멋졌다. 내가 갖고 싶을 정도로. 하원 시간에 엄마에게 보여주자 준호 어머니는 너무나 좋아하면서 당장 액자하러 가자고 했고, 준호에게 뭘 먹고 싶은지, 뭘 갖고 싶은지 물어보면서 즐겁게 하원했다. 준호의 걸작, 공룡은 위풍당당하게 액자에 들어가서 단독샷으로, 작가인 준호와 함께, 그런 준호를 자랑스러워하는 온 가족들과 함께 웃는 사진으로 찍혀서 모두에게 공유되었다.
그 무렵 나의 논문 중간 발표가 있었다. 나는 준표의 대표작인 공룡 그림과 그 그림을 들고 웃고 있는 준호의 모습을 ppt로 작성해서 이 놀랍고도 아름다운 사례를 발표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환해졌고, 특수학교 선생님 중 한분은 어려움이 있는 아이의 드라마틱한 성장 스토리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발표가 끝나고 박수가 터져나왔고, 쉬는 시간에 '이 사례를 학회에서 발표했으면 좋겠다.', '좋은 논문이 될 것 같다.', '끝까지 잘 마무리하기를 바란다.', '책으로 내도 좋겠다.'는 긍정적인 피드백이 쏟아졌다.
며칠 후, 준호랑 제일 친한 찬수의 생일 카드를 그리는 날이었다. 또래 남자 아이들은 찬수가 제일 좋아하는 공룡을 그리고 있었다. 준호는 그림을 그리지 않고 다른 친구들의 그림을 부러운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리지 않느냐고 하자, 준호는 고개를 떨구더니 학기 초에 그랬던 장면과 똑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나는 못 그려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지난번에 공룡 잘 그렸잖아. 액자해서 벽에도 걸고. 사진도 찍고."
준호는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을 있더니 울부짖으며 포효했다.
"그거 내가 그린 거 아니란 말이예요!"
할 말이 없었다. 순간, 준호에 대한 실망감이 밀려왔고, 갑자기 피곤해졌다.
"선생님, 발도르프 유치원에서 페인팅을 하면 상상력이 발달한다더니 우리 준호는 왜 이럴까요?"
준호 어머니의 과도한 칭찬과 걱정스러운 표정이 오버랩 되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실망스러웠다. 그러고보니 아파트, 헬리콥터, 호랑이, 공룡, 무엇이든 거침없이 그려서 나에게 들고와서는 자랑스럽게 설명했던 그 그림들을 준호가 직접 그리는 장면을 본적이 없다는 사실이 소름끼치게 생각났다. 이 어린아이한테 속아서 사실을 확인하지도 않고 중간 발표를 했으니 어디서 어떻게 정리를 해야할지 혼란스러웠다.
학기 말 즈음에 준호 어머니는 아이에게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고 하시면서 결국 유치원을 옮기는 것으로 결정하셨다. 그 결정을 받아들이면서 나도 더 이상 준호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고 이 곳에 있는 동안 준호가 편안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는 것 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준호는 그림 그리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지 않고 나에게 다가와서 공룡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초식공룡이예요. 저는 다섯살 때는 티라노사우루스를 제일 좋아했는데, 여섯살 되고나서는 바꿨어요. 지금은 스테고사우루스를 제일 좋아해요. 멋지게 생겼잖아요."
나는 준호가 유치원을 그만두게 되고나서야 처음으로 준호가 좋아하는 공룡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그 전에는 준호의 공룡 그림의 진화에만 관심이 있었고, 준호가 "크아아앙!" 공룡 소리를 내면서 "쿵쿵쿵쿵!" 교실을 가로지르며 뛰어다니는 것을 멈추게 하는 것에만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논문 발표의 결론으로 나는 어느 시인의 시를 낭송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나는 너의 좋은 데를 안단다
우리가 길가며 만나는 이마다
그렇게 말한다면
이 낡은 세상도 나아지지 않을까
나는 너의 좋은 데를 안단다
그리고 우리를 부드럽게 대한다면
그 얼마나 아름답고 복스러울까
미덥고 정답게 손잡을 때마다
그렇게 마음으로 알게 된다면
인생이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논문 발표는 그림으로 시작했지만, 나아진 그림의 결과를 보여주기 보다는 하나의 질문이 남겨졌다.
"준호는 왜 어른들에게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았을까?"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스며들듯이 이런 답이 주어졌다. 어린 아이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도와줄 어른을 알고 있다. 그 어른이 자신을 도와줄 힘이 없다고 생각되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이 그 동안 숨겨왔던 아픔을 뒤늦게 알게 되면 쉽게 말하곤 한다.
"그때 왜 말 안했니?" 라고.
잘 생각해보면, 그때 말을 했다면 달라졌을까? 해결해 줄 수 있었을까?
그럴 때면 또 이런 말도 곧잘 하곤한다.
"말 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 만으로도 힘이 된다"고, "넌 혼자가 아니야"라고.
과연 그럴까? 때로는 혼자가 아닌 것이, 곁에 있는 것이 침입이 될 수도 있다. 걱정과 관심이 사랑이 아니라 방해가 될 수도 있다. 나 자신을 모르고서는 태산을 옮기는 노력으로도 사랑하는 사람을 도울 수 없고, 오히려 고통을 줄 수도 있다.
공룡은 6500만년 전에 지구에서 멸종했다.
하지만 우리의 발 밑 깊숙한 곳에서 울부짖으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우리 집 창문을 부수고
내 가족에게 포효하던
널 다시 만나면
그땐 너보다
더 크게 소리 지를래
어릴 적 내 꿈에 나온 다이노소어
우우 - 우우후후후후~ 우우후후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