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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Apr 19. 2024

1991년의 새점

-feat. 옥상달빛 <달리기>


옛날 옛날 호랑이가 담배 먹던 시절(까지는 아니고), 고등학교 때 이야기다. 어두운 폴더 속에 있던 이 글이 오늘 새하얀 브런치 페이지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순전히 매미 작가님의 질문 덕분이었다. 어제 자 발행 연재 브런치 <인생은 스톱모션 - 희망의 조각>에서 새점에 대해서 썼고, 나는 사람들이 새점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대한 부연을 하지 않았는데, 브런치 마을의 다정한 이웃 매미 작가님께서 순수한 호기심을 표현해 주셨다.


매미 작가님 : 혹시, 새점이란 게 진짜 훨훨 나는 새가 치는 점인가요? 그 새는 말을 하나요, 앵무새인가..

나 : 아하! 새점에 대한 설명을 안 드렸군요. 마침 새점에 대해서 써놓은 글이 있어서 내일 자 글로 발행해야겠다 싶습니다. 매미 작가님 덕분에 묵혀두었던 글을 꺼내보게 되네요. 참, 새는 새 맞습니다. 훨훨 나는 새 bird. 어떻게 점을 치는지는 내일 알려드릴게요. 커밍쑨... ^^/

 

그 내일이 바로 오늘이고 이리하여 1991년의 새점 이야기가 시작된다. 두둥~




화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들도 퇴근을 하면 남아서 연습을 했다. 그림을 그릴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놀았다. 우리는 당시에 유행했던 분신사바 놀이에 심취해 있었다. 모든 조명을 소등하고 어둠 속에서 종이 한 장과 연필을 가운데 두고 진지하게 둘러앉았다. 분신사바, 이른바 영혼을 부르는 죽음의 주문이다.


우리는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꽤 진지하게 귀신놀이에 빠져들었다. 죽고자하는 본능, 타나토스적 이끌림에 지배된 여고생들은 연필을 마주 잡고 주문을 외웠다.

"분신사바, 분신사바, 오이떼 쿠다사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면 연필이 슬슬 원을 그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필은 점점 빨라지고 거세지면서 종이가 찢어지도록 휘몰아쳤고, 종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 형광등을 켜는 것으로 멈출 수 있었다.





한 번은 주임 선생님이 퇴근했다가 잊은 게 있어서 다시 화실로 돌아왔고 분신사바 놀이를 하고 있던 우리는 딱! 걸렸다. 혼날 줄 알고 잔뜩 겁먹고 있는데 뚜벅뚜벅 우리들 가까이로 다가온 선생님은 뜻밖의 말로 우리의 예측을 깨고 색다른 전개를 시작했다. 자기도 같이 하자며 분신사바의 대열에 합류한 것이었다. 어른이나 된 선생님은 분신사바뿐 아니라 유체이탈을 가르쳐 준다고도 했고, 대학 때 새점 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고도 하면서 자신이 신기가 있으며 영학을 많이 공부했다면서 이 놀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표명했다.


새점에 대해 궁금해하자 선생님은 어느 날 진짜 새가 든 새장을 들고 나타났다. 새장 안에는 작고 예쁜 개나리색 카나리아가 한 마리 들어있었다. 선생님은 새장 문 앞에 아주 조그맣게 접은 쪽지가 가득 든 플라스틱 그릇을 내려놓았다.

"누구부터 할래?"

"저요! 저요!"

아이들은 그 작은 새가 내 운명을 알려준다는 데 대한 호기심으로 그림을 그릴 때는 보지 못했던 반짝임으로 빛났다.


내 차례였다. 선생님이 생년월일을 물었고, 곧 새장 위에 손을 올리더니 눈을 감고 뭐라 뭐라 주문을 외웠다. 그리고 새장 문을 열었다. 횃대 위에 앉아있던 노란 새는 문이 열리자 총총총총 걸어 나오더니 그 작은 부리로 주저 없이 하나의 쪽지를 콕! 찍어서 선생님 손에 내려놓았다.

선생님이 쪽지를 펼치고 읽기 시작했다.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계속 운이 좋다!"

새가 점지해 준 내 운명이었다.



뇌과학자 정재승은 <열두 발자국>에서 ‘미래라는 굉장히 통제하기 어렵고 예측하기 힘든 상황에서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인과관계를 억지로 갖다 붙인, 그래서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는 노력’이라고 미신을 믿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세상이 우리에게 준 불합리한 입시의 초조함 앞에서, 죽음 본능에 이끌렸던 우리는 그래도 죽지 않았다. 분신사바를 마치고 나면 살고자 하는 본능, 에로스의 이끌림에도 지배되었기 때문이다. 귀신에게만 이끌리기에는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화실을 나와서 우리는 밤하늘을 보며 달렸다. 한참을 달리다가 멈춰 서서는 고등학생이나 된 아이들이 '달이 여기에 또 있다'느니, '달이 우리를 따라왔다'느니 하면서 바보 같은 소리를 하며 깔깔댔다. 바보 같은 나와 같이 놀았던 또 하나의 바보는 여덟 살 때까지 자기가 '솥띠'인 줄 알았다고 했다. (우리는 소띠였다.) 우리는 누가 더 바보인가? 바보를 인증하는 에피소드를 쏟아내며 밤길을 걸었다. 그러다 포장마차에서 튀김가루가 잔뜩 들어간 우동을 후루룩 먹었고, 화실 오빠들 중에서 누가 제일 잘 생겼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했다. 한심하고 아픈 나날이었지만, 달님은 우리가 총명할 때나 아둔할 때나 변함없이 우리를 따라와서 공평하게 비춰주었다.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계속 운이 좋다!"

10대 때 들었던, 카니리아가 점지해 준 점괘는 50이 된 지금 생각해 보면 맞았다. 오늘 아침에도 잘 자고 일어나서 새롭게 시작된 하루 앞에 서 있으니까.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 모두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 사는 날까지... 계속 운이 좋을 것입니다!"


카나리아는 몸길이 2.5~13.5㎝, 무게 15~20g의 작은 새다. 대서양 카나리아 제도가 원산지인 이 새는 앙증맞은 모습과 깜찍한 울음소리가 예뻐서 수백 년간 애완용으로 길러졌다. 카나리아는 체구가 작고 대사활동이 빨라 일산화탄소 등 유독가스에 사람보다 민감하게 반응한다. 19세기부터 광부들이 새장에 든 카나리아를 갱도에 데리고 간 까닭이다. 카나리아가 울음소리를 멈추고 바닥에 쓰러지면 갱도를 탈출해야 한다. ‘탄광 속 카나리아(canary in a coal mine)’는 재앙이나 위험을 미리 알리는 경보를 뜻하는 말로 쓰인다.

2022-11-02 국민일보 [한마당] 이태원 카나리아 | 전석원 논술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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