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해 쓰는가
너에게 나를 보낸다
글을 쓰다가 <너에게 나를 보낸다>라는 제목이 떠올랐고, 이게 오래전에 본 영화 제목인 것 같아서 찾아보니 1994년에 개봉한 영화였다.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던 그 영화는 아마도 내가 본 최초의 청불영화였던 것 같다. 한국 문단의 문제적 작가 장정일 소설 원작으로 그 시대에 핫했던 배우 문성근, 정선경, 여균동이 각각 소설가 지망생인 나, 세계적인 엉덩이를 가진 여자, 은행원으로 나와서 끊임없이 섹스에 대한 이야기만 하는 영화였던걸로 기억된다. 왜, 어쩌다, 누구와 보았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용이 와닿지 않고 공감이 일어나지 않았던 기억이 있는데, 다시금 줄거리를 읽어보니 지금 다시 본다면 영화의 많은 부분들이 말을 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모스 부호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모스 부호는 당시 영화의 이슈만큼이나 널리 회자되었던 영화 속 디테일 중 하나였다. 전등의 깜빡이는 불빛으로 전달되고 있는 긴박한 신호를 박 사장 가족은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저 전등이 고장 난 것이라고 외면한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신호는 무용해지고 모스 부호를 찍어 누르는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비극을 향한다.
누구를 위해 쓰는가
글을 쓰면서 과거에 썼던 글들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폴더를 정리하거나 종이 노트에 쓰인 글들을 보면서 회상에 잠기곤 한다. 어떤 글은 누가 볼까 봐 갈겨썼거나 아주 작게 깨알같이 썼거나 잠결에 써서 알아볼 수 없는 것도 있다. 알아보지도 못할 글들을 왜 이토록 많이 써왔고, 쓰고 있고, 계속 쓰려고 하는 것일까? 명확하게 읽히는 메시지든 모호한 글이든 이 글들은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현재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나 자신에게 보내는 암호라는 생각이 든다. 살아가라고. 계속해 나가라는 응원의 모스 부호로 여겨진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면 누구를 위해 쓰고 있는 것일까? 미래의 자신을 위해? 나중에 때가 되면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고, 고쳐 쓰고, 메모한 것들을 정리하고, 책으로 묶기 위해서? 혹 작곡가라면 브람스처럼 인생의 초기에 자신을 위해 많은 주제를 스케치해 두었다가 만년에 자신의 대작들 속에 짜넣기 위해? '자신을 위해서' (또 자기 자신 앞으로, 왜냐하면 내면의 글은 모두 감추어진 은밀한 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밤, 노트, 때론 병상까지 택하면서 이 말들을 자기 자신에게 털어놓는 것이다)라는 것은 또한 '예전의 자신'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바로 어린아이였던 자기 자신에게 이 암호들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시간을 가로질러 바로 그에게 신호를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비밀 속에는 모순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종이라는 매개물을 이용해 써진 이 메모들이 종종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왜일까? 자기 자신에게든 누구에게든 읽히게 한다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 아닌가?
글을 쓴다는 것, 그런 우리가 시간 속에 자리를 잡고 시간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는 건 시간을 위해 글을 쓰는 것이라고, 이렇게만 말해 두기로 하자.
-미셀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214-2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