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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May 08. 2024

살고 싶은 도시 1위

-<오랜일기> 28화.


 

딸은 학교에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내 고등학교 시절과 흡사했다. 그래도 대학은 가야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가능하지 않겠냐는 식구들과 마찰을 빚었고, 딸은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나날이 더 힘들어했다.

대학 진학 관련 문제로 담임 선생님과 통화를 했을 때, 선생님은 딸에 대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말씀하셨다. 내가 봤을 때 딸의 문제는 없었다. 학교에서 누구를 괴롭히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괴로워하는 것에 대해 부모나 교사가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문제 삼는 것은 비인간적인 일로 보였다.

나는 아이 본인이 원하지 않고 아직 준비가 안된 것 같으니 대학을 안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담임 선생님은 예상치 못한 나의 반응에 당황해하셨다. 그 통화 이후로 담임 선생님은 딸의 문제를 곧 엄마인 나의 문제로, 내가 문제가 많은 사람으로 보시는 것 같았다(선생님께서 잘 보시긴 하셨다). 진로 상담 통화 이후, 딸의 남은 학교 생활은 자퇴를 거론할 만큼 극단적인 어려움으로 치달았다. 어느 날, 딸에게 말했다.

“도저히 못 다니겠거든 자퇴해라.”

그렇게 말하고 난 뒤 며칠, 아이는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았다. 그리고, 나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도 고등학교는 나와야 되지 않겠어?”

그렇게 해서 딸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친구들은 모두 대학에 갔고, 인문계를 나와서 취업 준비도 안되어 있었던 딸은 딱히 할 일이 없었고, 아르바이트의 전선에 뛰어들었다. 일 년 차 때는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두, 세 달씩 하다가 작은 불만이나 힘듦을 사유로 그만두었다.



당시에 내가 하고 있던 2인 1조 목욕탕 마감 청소의 파트너였던 할머니가 집안 일로 갑자기 그만두시게 되었고, 나는 새로운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는 힘은 들어도 혼자 하기를 원했으나 목욕탕 측에서 혼자 하기에는 일이 너무 많아서 안된다고 하면서 같이 할만한 사람이 없냐고 했다. 다음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던 딸이 생각났다. 부모와 같이 일하는 것이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딸이 당장하고 있는 일도 없고, 내 입장에서도 이제 익숙해져서 밤에 운동하는 셈 치고 청소하고, 공짜 달 목욕도 하고, 용돈 벌이가 되는, 꿀 알바를 놓치기가 아까워서 딸에게 제안해 보았다. 처음에는 너무 험한 일이라고 생각했는지 조금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고 하더니 한나절만에 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우리 모녀는 목욕탕 청소를 하는 직장 동료가 되었다. 이런 허드레 일에 대해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겁을 내지만 해본 입장에서는 오히려 겁을 낼 일은 이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너무 쉽게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일이 익숙해지면 고기 맛을 잊지 못해서 고기 가마를 떠나지 못하는 노예근성이 생기듯이, 일 하다 보면 몸도 건강해지고, 돈도 벌리고, 생각보다 힘들지도 않아서 할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오히려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혹자는 '저 사람이 어쩌다 저런 일까지 하게 되었을까?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그 '천'이 자신이나, 자녀, 주변 사람에게 적용될 때, 그 즉각 저항하기 마련이다.) 그 혹자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는지, 해야 되는 일을 해야 되는지'와 같은 문제로 상담을 받고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는 것처럼 돈이 필요하면 일을 하고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하고 단순하게 산다. 불안하지 않느냐고? 깨달음이라는 단어를 굳이 쓰자면, 삶이란 원래 불안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다. 이 세계는 흔들리는 터전이며 정해진 안정이란 애초에 없다. 그러니 너무 안달복달, 이거 아니면 안 된다.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살면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그럴듯한 일도 많이 했고, 사람들이 두려워할 만한 허드레 일도 많이 했다. 나는 그 일들이 꼭 공모전 같다고 생각한다. 동일한 노력으로 작품을 응모하지만 대상을 받을 수도, 입선에 그칠 수도, 낙선할 수도 있다. 대상이라도 상금이 적을 수도 있고, 낙선을 해도 나에게 대상을 받은 것보다 더 애착이 가는 작품일 수도 있다.

매끈하든 험하든 모든 것은 내가 선택한 나의 길이다.



딸과는 6개월 간 목욕탕 청소를 했다. 아무도 없고, cctv도 없는 목욕탕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다. 자동으로 에코가 되는 *목욕탕에서 노래를 부르면 노래를 엄청 잘하는 것 같이 들렸다. 그 목욕탕이야말로 우리들의 블레싱 노래방이었다. 그 블레싱 노래방은 코인이 아니라 땀으로 가동되었다.

*막간 깨알 정보 : 목욕탕에서 노래를 부르면 더 잘 불러지는 것 같이 느끼는 것이 울림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한다. 목욕탕 공기가 바깥공기보다 습기가 많아서 성대가 촉촉해지기 때문이라고.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발바닥이 야물지 못한 딸은 목욕탕 바닥에서 미끄러져서 자주 멍이 들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여기서 넘어지고 멍이 들어야 더 넓고 거친, 흔들리는 터전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매정한 마음으로 봐 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겨울 어느 날, 이제 그만하자며 그만두었다. 목욕탕 일을 끝낸 날, 딸과 조촐한 회식을 하는 자리였다. 딸이 말했다.

“엄마는 꼭 주디 같아.”

“주디가 누구야?”

“주토피아 안 봤어? 엄청 유명한 건데?”

“한번 볼게.”

나중에 혼자 주토피아를 찾아서 보았다. 주디는 토끼였다. 그냥 토끼가 아니라 ‘토끼는 당근을 먹고살아야 한다’ 며 경찰관이 되려는 꿈을 반대하는 가족들을 만류하고, 고향인 농장을 떠나 살고 싶은 도시 1위인 주토피아에 입성한 최초의 토끼 경찰관이었다.



딸이 나를 그토록 멋진 캐릭터에 비유해 준 것에 대해 감동과 감사가 올라왔다. 그동안, 나조차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고,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내 삶을, 딸은 그 하나의 단어로 너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딸에게 지지를 받고는 쑤욱 올라온 힘으로 2차로 노래방에 갔다. 나는 주토피아에 입성한 주디가 된 것처럼 폴짝대며 포텐을 터뜨렸고, 노래방 사장님은 우리 토끼 모녀에게 시간을 계속 추가해 주셨다. '기가 빨려서 앞으로 엄마랑은 노래방에 못 가겠다'는 딸의 마지막 대사를 끝으로 우리들의 행복 목욕탕 로드 대장정은 막을 내렸다.



딸은 고등학교 졸업 후 2년 차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지 않고 1년은 채우겠다는 포부를 밝혔고, 실용음악학원에 등록해서 보컬과 기타를 배우고, 일본어 능력 시험을 치겠다는 목표를 스스로 세웠다. 그리고는 단 하루의 결근이나 지각 없이 고된 정규직 1년을 꼬박 채웠다. 1년 후, 퇴직금으로 일본 여행을 다녀왔고, 여행 가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브리핑했다. 이제 하고 싶은 공부가 생겼다고 말이다. 



살면서 누구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지금까지 들었던 말 중에 단연 기분 좋은 것은 바로 살고 싶은 도시 1위 주토피아를 지키는 최초의 토끼 경찰관, 주디 홉스다. 




Try Everything | Zootopia 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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