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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n 04. 2024

아는 것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

-<원라이너> 5화.




올해 노벨 문학상은 오스트리아 작가 페터 한트케에게 돌아갔다.

처음에 신문에서 이름을 접했을 때는 생소한 이름이어서 문학을 한다고 하면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접하지도 못했구나 싶었는데, 본문을 읽으면서 <관객모독>과 <베를린 천사의 시> 각본을 쓴 작가였다는 것을 알고 무지 반가웠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잘 알려지고 대중적으로 성공한 이 두 작품이 같은 작가인 페터 한트케의 손을 거친 것인지 모르고 각각 내 삶의 한 모퉁이에서 강렬하게 만났던 것이었다.



관객모독은 고등학교 때 연극을 처음 접할 무렵 보게 되었는데, 실험적인 아방가르드한 형식에서 부터 타성에 젖은 관객의 태도를 그야말로 모독하는 내용에서 큰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네 명의 배우가 쏟아내는 말만으로 이루어진 언어 실험극이었던 그 연극은 당시의 의식 수준으로 거의 이해를 못했지만, 카프카의 '책은 도끼여야 한다'는 말처럼 꿈결같이 몽롱한 의식을 강하게 내리쳐서 깨우는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꼭 이 작품 때문만은 아니지만 고등학교 시절, 친한 친구가 연극을 전공하게 되었고, 나는 당시 미술을 한답시고 화실에 다니면서 든 겉멋과 더불어 연극하는 친구와 같이 연극 무대를 자주 찾아다니며 연극에 대한 꿈도 슬쩍 키웠던 시절이었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로만 알았지 페터 한트케와의 공동 작업인줄은 몰랐다. 베를린 천사의 시는 러닝 타임 중간 중간 pause시켜놓고 자막을 베껴적으며 여러 번 본 인생 영화 중 하나다. 너무나 예술적이고 시적이고 창의적이고 아름답다.



그 두 번의 강렬한 만남에 이어 오늘, 도서관에서 신문으로 본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통해 일흔 일곱의 페터 한트케와 세 번째로 만났다. 열람실에서 그의 작품들을 찾아서 읽으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내가 언젠가 쓰고 싶었던 소재인 엄마에 대한 이야기와 자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몰입이 되었다. 누구나 쓰고 싶지만 언어로 표현해내기 어려운 감정들을 객관적 관찰자 입장으로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초연한 힘에 압도되었다.



첫 번째, 두 번째 만남 때는 내가 그의 이름을 모르는 상태로 작품을 통해 만났고, 세 번째 오늘, 그의 이름을 알게 된 오늘의 나는 과거의 기억을 꿰뚫으며 이전의 두 번의 스쳐감에 비해 훨씬 더 문학의 세계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세 번의 각각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의 나는 그 때 마다 나이와 하는 일이 달랐지만 공통점은 그 때 마다 그의 작품에 열광했다는 점이다.



어젯밤, 페터 한트케를 기억하는 글을 쓰고나서 아침에 일어나자, '아는 것'과 '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다른 시각이 열렸다.

'모르는 것'과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을 포함해서 의식에 포착된 명징한 앎과 무의식에서 기억하고 있는 잠재적 앎이 있다는 것을 기록해 두고 싶다.



오래 전 꿈 작업을 할 때, 내가 생전에 보지못한 원시 생물체 같은 것을 보았다. 바퀴벌레 같기도 하고, 고대 이집트 벽화에 있는 풍뎅이 같기도 했던 그 갑각류 같은 생명체는 그 때는 이미지로 보아서 알았지만 분명한 이름으로 규정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과학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그것이 고생대를 대표하는 동물인 삼엽충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5억 7,000만년 전, 고생대 초 캄브리아기에 바다 밑을 기어다니며 살았던 생명체, 삼엽충.



한번은 꿈에서 독수리를 보았다. 사실 독수리는 아니었고 독수리 같이 생긴 검은 큰 새였는데 머리 부분이 살색으로 벗겨져 있는 독특한 모습이었다. 이름을 정확히 몰라도 문자로 기록하려면 비슷하게 아는 단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으니 일단 독수리라고 쓴 것이다.

한 번도 본적이 없기에 그게 인면조인가 생각해보기도 하고, 머리 부분이 벗겨진 것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좋은건지 나쁜건지 유추해보기도 했다. 그 역시 오랜 시간이 지나 고대 마야 문명에 대한 책을 읽다가 그 새의 이름이 콘도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몸 길이가 1.3m, 날개를 펼치면 3m, 몸무게가 10kg이나 되는 거대한 육식성의 맹금류, 콘도르.



원래 그렇게 생긴 그 개체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에 검은 머리여야 하는데 머리 쪽만 벗겨진 것이 좋은건지 나쁜건지 어떤 의미를 유추했던 것은 무지한 나의 망상이었던 것이다. 내가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그냥 그렇게 생긴 독특한 생명체가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본적이 없고 그 존재를 모르니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가장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는 독수리의 특성에 끼워 맞추려고 했고, 그러다 보니 독수리에 비해 뭔가 부족한 모습으로 보였고, 그러자 없는 의미를 만들어 내려고 했던 것이다. 콘도르라는 크고 멋진 새가, 내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멀고 오랜 세상에서 신대륙을 열었던 것이다.



돌로 된 상형 문자가 새겨져 있고 건물들이 금으로 번쩍이며 지하인데 물에 차 있는 공간이 꿈에 나왔을 때도 그 장면을 기록할 때 이집트 지하 감옥(인 것 같다)고 써 놓았다. 이후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아틀란티스 왕국에 대한 묘사를 읽으면서 -플라톤에 따르면 BC 9,500년경 문명국 아틀란티스는 헤라클레스의 기둥 앞에 위치한 해상 국가로 신전을 중심으로 동심원 구조 도시가 형성되어 육지의 도로와 바닷길로 이어져 있으며 금은보석으로 걸어 다니는 길을 꾸민 지상낙원이었다. ... 도시 중심부 건물들을 금이 입혀진 건물을 제외하면, 모든 건물이 은으로 덮혀 있었다고 한다. -그 때 꿈에서 본 이집트(인 것 같다)고 기록했던 공간이 떠올랐고, 그 곳이 고대 아틀란티스였다고 데이터베이스를 업그레이드했다.

언어로 정확하게 규명되지 못하지만 이미지로만 알고 있는 앎이 나중에 의식에서 연결되면서 더 견고한 언어와 앎으로 확장되는 경험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세상을 처음 배워가는 방식도 이와 같다. 물을 배울 때 처음부터 H20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물'이라는 단어로 만나지 않고 그 이름은 모르지만 따뜻하고 출렁거리는 '그런 것'이 그저 '있는 것'으로 경험하게 되고, 그 경험이 나중에 물로, 물의 기능으로, 화학 기호인 H20로 분화되어 앎의 지평을 넓혀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따뜻하고 찰랑거리는 물에서 기쁘게 노는 아이가 '물'이라는 단어를 모른다고 해서 그 아이가 진짜 모른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또는 H20를 아는 어른이 물의 소중함과 기쁨을 모른다면 물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철학자는 스스로 설명할 수 없으면서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모르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측면에서는 그렇다. 한편으로는 말로 설명되어진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고대인들처럼 기억할 수 있는 힘, 느낄 수 있는 힘이 진정한 앎이라고도 한다.

앎이란 마치 말해지지 않는 침묵과 말해지는 언어와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말해지지 않은 침묵 속의 말과 기도가 쌓이고 흘러 넘쳐 실재로 작용하는 무엇이 되는 것 처럼 모르는 것,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리저리 뒤 섞이고 쌓이고 중첩되고 연결되어 어느 순간 명료한 언어로 솟아오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보여지는 것도 설명되어 질 수 있을 것이다.



큰 스님들이 하시는 법문에서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따로 없고 둘이 아니다'라는 의미도 이러한 순환의 고리를 말하는 것일테다. 

안다고 까불지 말고 모른다고 기죽지 말 것. 

씨앗이 싹이고 싹이 꽃이고 꽃이 열매고 열매가 씨앗인 것.

마음이 생각이고 그림이 글이고 그렇게 표현된 것에서 다시 마음이 사라지고 생각이 일어나는 순환.

그런 메커니즘을 마음 속에 품는다면 오늘 당장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오늘 전체의 마음가짐, 삶 전체의 노력, 전 존재로서의 과정을 묵묵히 살아나갈 수 있지 않을까.

씨 뿌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단어를 꽃 피우고 수확해나가야 겠다는 단단한 생각으로 여는 시월의 토요일 아침이다.





이 글은 2019년, 성호신인문학상 산문부문 수상작입니다.






페퍼톤즈 | 남반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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