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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Jul 22. 2024

고마운 마음

-<재생의 욕조> 12화.



이제 웬만한 일에는 눈물이 잘 안 난다.

눈물샘이 마른 것 같았는데, 모처럼 눈물을 흘렸다.

펀딩 일로 오래 연락 안 하고 지내던 지인들에게 연락을 했고, 책 마무리 되면 가을에 보자고 했던 과거 유치원 동료 선생님이 지나가던 길이라며 집 근처로 찾아와 만났다.



컴퓨터 조작을 잘 못해서 후원하는데 오전 내내 걸렸다는 말로 웃으며 대화의 문을 열었다.

어렵게 어렵게 전 과정을 진행한 후 마지막 개인정보 동의 페이지에서 뭘 잘못 눌러서 페이지가 닫혀버렸고, 처음부터 다시 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후원이 된 건지 아닌지 확인이 안 되어서 혹시 돈이 들어갔는데 또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렇게 생각을 바꿨다고 하셨다.



두 번 들어가면 뭐 어떻노?
예샘이 나한테 어떤 분인데...



이 말씀을 하실 때 눈물샘이 차올랐지만, 참았다.

선생님은 잠시나마 돈이 두 번 결제되면 어떡하나 걱정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하셨다.

이어서 하신 말씀에 참지 못하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있는 사람들한테 500만 원이 돈이 가?
어떤 남자들 하룻밤 술값 밖에 안되고,
어떤 여자들 명품백 하나 값 밖에 안되는데...
샘 소식 듣고, 있으면 내가 그냥 500만 원 쥐어주고 싶더라.



이현진 선생님은 힘들었던 발도르프 유치원 트레이닝 과정에서 동고동락했던 분이다.

나는 그 당시에 교육과는 거리가 있는 미술 쪽으로 공부하고 경력을 쌓아오다가 우연한 기회로 합류하게 된 경우였고, 선생님은 그 이전부터 공동육아를 해오시던 분이라 나보다 연배도, 경력도 있으시고, 교육에 대해,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내가 의지할 수밖에 없는 분이셨다.



우리가 일했던 발도르프 유치원은 원장 선생님의 취향이랄까, 방향성에 있어서 예술적인 측면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여서 눈에 드러나는 일은 내가 주로 많이 하게 되었다. 가령 계절탁자라든가, 꽃꽂이, 생일 준비 등 눈에 보이는 미적인 환경을 만드는 데 있어서 내가 조금 더 능력을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한 학기를 기점으로 한 번은 내가, 한 번은 선생님이, 그만두는 일로 심각하게 고민할 만큼 힘들었고, 그때마다 할 말, 못할 말 분별없이 쏟아내는 나를 모든 것으로 이해해 주는 큰 언니 같았다. 후회할 만한 말도 해버리고는 쉽게 번복하고 미안하다고 하는 양은 냄비 같은 나에게 선생님은 단 한 번도 훈계나 서운한 말씀 없이 늘 특유의 웃음을 웃어 보이시며 똑같이 말씀하셨다.



 샘은 예술가라서 그렇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내가 한 말과 행동에 대해서, 성정이 불안한 사람이 또 저런다고 할 만한 짓을 무수히 했는데도 말이다.



힘든 트레이닝의 끝에 나는 논문을 쓰고 발도르프 유아교사 디플롬을 받았고, 선생님은 논문을 드랍하시고 유치원을 그만두게 되셨다. 선생님은 발도르프 유치원에 오시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자격증으로 다른 유치원에서 계속 일하게 되셨고, 나는 일반 유치원에서는 인정이 되지 않는 자격증이라 다니던 곳이 와해되었을 때 같은 일로 취업하기가 쉽지 않았다.



모든 과정에서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던 그 길을 함께 걸었던 분, 나이가 비슷했거나 마음이 안 맞았다면 얼마든지 시기나 오해와 갈등이 있을 법한 상황이 속출하는 환경이었지만, 선생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지지하고 이해해 주고 함께 갈 수 있도록 여유로운 반응을 보여주신 분이었다.



남편이 직업을 바꾸어서 지금 당장은 남편 수입이 없어서 선생님이 직장을 다니시면서 방학에도 다른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생활이 팍팍하신 와중이셨다. 괜히 연락드렸다 싶었는데, 선생님은 내가 멈추지 않고 자신이 좋아하는 모습 그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너무나 반갑고 자랑스러웠다고 말씀하심으로써 눈물샘을 폭발시켰다.



선생님 말씀처럼 나에게 500만 원이 하룻밤 술 값이나, 명품백 하나 살 만큼 가벼운 돈이었다면, 자비로 500을 들여서 마음 편하게 종이책 1000부 인쇄할 수 있는 안정된 삶을 살았더라면, 지금과는 많은 것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글도 품세가 달라졌을 것이고, 그림도 다르게 그려졌을 것이다. 절실한 마음으로 브런치에 터를 잡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웃들을 사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책을 내려고 했던 첫 마음을 생각해 본다.

글을 썼고, 그림을 그렸고, 그것이 쌓였고, 그림책은 종이책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종이책은 돈이 들고, 돈이 없어서 펀딩을 했고, 무명작가가 펀딩에 성공하기 힘들 것 같아서 과거의 인연들에게 염치 불구하고 연락을 했다.



겸손이 아니라 진실로 나는 그들에게 잘한 게 없다. 그런데도 모두가 도움을 주고 있다.

그게 무엇이든 '진짜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열대의 나무처럼 쑥쑥 자라나는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탕자, 돌아가는 길에서 뚝배기의 온기를 여전히 소유한 사람들을 만나며,

세상의 뜨거운 불길에 거친 감정을 연마해서 보다 미세하고 깊은 마음, 고마운 마음을 다시 배운다.




고마운 마음이란,
타인에게 빚지고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 빚을 소중한 관계의 형태로 여기는 것입니다.
-델핀 드 비강





생각의 여름





<재생의 욕조> 후원 페이지 가기

https://tumblbug.com/rebath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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