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렌 Aug 15. 2024

오랜문학상의 오래된 이야기

-<작가님 글도 좋아요> 15화.




오랜문학상의 시작은 매우 즉흥적이었다.

이미경 작가님의 글과 그림 앞에서 한참을 머무르며 이렇게 좋은 글, 그림이 노출이 적다는 것이 안타까웠고, '내가 상을 줄 수 있다면 상이라도 드리고 싶다'는 농담 같은 댓글을 썼고, 이에 김소이 작가님께서 '오렌문학상을 만들어 주세요!'라는 재미난 댓글을 써주셨고, 다이소에서 사 온 오렌지색 플라스틱컵으로 '창조의 오렌지컵'을 만들어서 장난처럼 시작한 일이었다.



심층적으로는 오래되고 깊은 갈망이 잠재되어 있었던 것이 그 순간에 의식의 표면 위로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식적인 이름은 '오랜문학상'이지만, 내 마음속의 별칭은 사실 '정수옥 예술상'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하나의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벌써 이십 년 전의 일이다. 결혼 전에 하던 웹 디자인 일은 일이 너무 많았다. 육아를 하면서 병행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아동 미술학원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더 큰 세상과의 연결에 늘 갈증을 느꼈고 신문을 보던 중 손톱만 한 그림 한 장에 호기심이 생겼다. 



영하의 날씨에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소개 글에 나와있는 전시회장을 찾아갔다. 난방도 되지 않는 서늘한 공간 벽에는 액자도 없는 종이 그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수채화라서 종이가 울퉁불퉁하기까지 한 그림들은 지금까지 보아온 그림들과는 사뭇 다른 기운을 뿜어냈다. 



관심이 증폭될 즈음 장발에 머리가 허연 중년의 남성분이 나오셔서 그림에 대해서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신문에서 본 그림은 영국 발도르프 학교에 다니는 한 자폐 학생의 그림이었고, 전시장에 붙어 있는 그림들은 유치원부터 각 학년별로 분류되어 성장 단계에 따른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고, 이는 각 문명의 발달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신문에서 본 손톱만 한 그림 한 장이 마치 태풍의 눈처럼 휘몰아쳐 거대한 세계가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인간 이해에 대한 방대한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발도르프 교육에의 강렬한 끌림은 곧 교사교육 과정의 공부로 이어졌고, 정기 수업 외에 독서, 그림, 유리드미(음악과 소리를 몸으로 표현하는 동작예술) 등 개설되는 소모임 전부를 다 등록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그중 그림 수업에서 정수옥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독일에서 박사까지 마치고 개인전도 꾸준히 하는 화가셨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했지만, 겸손한 자세로 우리들과 섞여서 같이 배웠다. 많지 않은 네댓 명의 학인들이 함께 그림을 그렸고, 그린 그림을 모아놓고 감상을 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선생님 그림과 옆에 나란히 놓인 내 그림이 너무 못 그려 보였고,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화가 선생님의 작품을 칭송했다. 

그때 정수옥 선생님이 내 그림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선생님 그림도 좋아요!



물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해서 번진 그림을 보시고는 우연히 살짝 번진 부분이 더 좋다거나, 형태가 일그러져서 망한 것 같은 그림을 보고도 그림은 고쳐서 그릴 수 있기 때문에 실패가 없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어떤 그림이든 다 좋다고 하셨고, 그 말씀을 듣고 나면 정말로 그림들이 다 좋아 보였다.



정수옥 선생님 자신은 얼굴을 주로 그리는데 젊은 시절에는 미운 사람들의 얼굴을 그렸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무리 미워도 얼굴에 황칠을 하거나 칼로 긋거나 망칠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 말씀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아무리 미워도 타인의 얼굴을 훼손할 수 없었다던 정수옥 선생님 그림에 나오는 얼굴들은 달님처럼, 보살처럼, 분가루처럼, 부드럽고 환하게 빛난다. 




소재를 밖에서 얻기 보다는 마음 속에 떠오른 생각과 기억 속 이미지를 드러내는 작업을 하셨다. 둥근 마음으로 세상을 껴안고 싶어 둥글고 환한 얼굴을 겹쳐서 표현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후에 발도르프 학교를 세우는 일로 -정수옥 선생님은 초등 1학년 교사로, 나는 유치원 교사로- 만나 직장 동료가 되었다. 정수옥 선생님은 바자회에서 내가 손바느질로 만든 공예품을 사주시면서 내 솜씨를 칭찬해 주기도 하셨고, 내가 힘든 상황에서 어려움을 털어놓았을 때, 선생님은 그 일에 대한 코멘트는 하지 않으시고 앞뒤 맥락 없이


예정옥 선생님, 좋아해요!



라는 밑도 끝도 없는 기습 고백으로 불만에 가득차 얼어붙은 내 마음을 온통 사랑으로 무장해제 시키셨다.



나란히, 앞뒤로 앉아서 공부하고, 함께 일했던 선생님은 어느 날,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하지만 아이들을 만나면서 자신은 붓을 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학교를 그만두셨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선생님은 수년 후에 특강 강사로 강단에 서셨다. 그동안의 사연인즉, 한 번뿐인 인생, 전 존재를 던져 후회 없는 삶을 살기 위해 딸에게 '혹시 엄마가 죽으면 할머니를 찾아가라'는 유언을 남기고 산에 들어가서 2년간 극도로 빈한한 삶을 살면서 그림을 그리셨고, 이후 그림이 크게 인정받아 삶의 새로운 장을 열어젖히고는 선생님의 그림처럼 환한 얼굴로 등장하셨다.




부부 화가이신 남편분과 정수옥 선생님




유치원 교사를 그만둔 어느 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을 때, 나는 작업실 바닥에 열 개가 넘는 캔버스를 깔아놓고 맨발로 돌아다니면서 미친 사람처럼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갑자기 목숨을 걸고 산에 들어가서 그림을 그리셨던 정수옥 선생님 생각이 났다. 선생님께 안부 메일을 썼다. '어떻게 하면 전시회를 할 수 있나요?'

역시 밑도 끝도 없는 4차원 또라이 같은 나의 편지에 선생님은 장문의 정성스러운 답장을 보내오셨다.

긴 편지에서 기억나는 대목은

 


선생님께서 그림을 그리신다니 반갑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전시는 그림이 쌓이면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림이 쌓이면 할 수 있는 게 당연한 말인데, 이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전시 욕심을 내고 성급하게 연락한 나는 선생님 특유의 진솔하고 담담한 글 앞에 부끄러웠다. 그림이 쌓일 때까지 묵묵히 그림을 그려야겠다고 다짐했고, 내가 그림으로 책을 내면 꼭 정수옥 선생님을 찾아뵙겠다고 생각했다.



2023년 5월 1일 부고를 받았다. 선생님께서 향년 62세로 너무 일찍 별세하신 것이다. 

늘 전 존재를 던져 목숨을 걸고 무언가를 이루어내어 새로운 명랑함으로 나타나서는, 잊고 살았던 오랜 꿈을 깨어나게하고, 나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분, 정수옥 선생님의 정신을 기리며 오랜문학상의 지속가능을 소망한다.



글을 쓰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글과 그림이 쌓이면 발표를 하면 됩니다.
한 번뿐인 인생,
전 존재를 던져서,
목숨을 걸고 한번 해보세요.
작가님 글도 좋아요!











































'오렌문학상'을 '오랜문학상'으로 이름을 변경합니다.

'오렌'이라는 제 작가명을 걸기 보다 '오랜'이라는 보편적인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메신저는 사라지고 메시지를 부각하기 위함입니다.


오래된 꿈, 오래된 이야기, 오래된 가치들을 

기억하고, 감정을 정화하여,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자는 의미를 담아봅니다.


오랜문학상은 연재 브런치북 <작가님 글도 좋아요>를 통해 격주로 발행합니다.






이전 14화 제 10 회 오렌문학상 수상작 발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