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만에 어릴 적 살던동네에 다녀왔다. 작은 동네지만 전국적으로 유명한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이 내 어린 시절의 공간적 배경이다. 부모님께서 맹자 어머니와 같은 생각으로 자녀 교육을 위해서 책방골목에 터를 잡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어쩌다 보니 책방골목 근처에 살게 되었고, 책과 상관없이라도 거의 매일 책방골목을 통과해 다녔다.
어릴 때 사촌 오빠도 같은 동네에 살았고, 사촌 오빠는 영재 소리를 듣는 머리가 비상한 아이였다. 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일찍이 두꺼운 안경을 썼고, 밥 먹을 때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으며, 바지 뒷주머니에 타임지를 꽂고 다녔다. 다른 아이들과 달라도 너무 달라서 그 정도면 밉상일 수도 있었을 텐데 성품까지 착하고 순박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며 유머까지 탑재하고 있어서 질투하거나 미워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빈틈이 없는 소년이었다.
사촌 동생인 나는 그런 사촌 오빠를 동경했지만, 책에서 그림이 없어지고 글자가 작아지면서부터 글자가 눈에 잘 안 들어오고 책만 읽으면 졸음이 오는 이상 증세가 생겼다. 세월이 흘러 삶의 다른 복합적인 문제들로 실타래가 꼬였을 때, 그것을 풀어나가면서 그때의 그 이상 증세가 난독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냥 책을 읽기 싫어하는 아이, 원래 총명한 아이인데, 어느 순간부터 학업에 흥미를 잃은 아이, 예술 쪽으로 재능이 있지만 공부 머리는 없는 아이 취급을 받았던 것 같다.
오빠는 틈만 나면 책방 골목으로 달려가서 헌책을 사 읽었다. 한 번은 한자가 다량으로 포함된 세로 활자의 두꺼운 삼국지 여섯권 전집을 사서 읽더니 너무 재미있어서 몇 번이나 읽었다면서 나에게 물려주었다. 1권 인물 소개 편에 그려져 있는 흑백 그림과 앞쪽 몇 장만을 여러 번 읽다가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오빠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얼마나 읽었냐고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아직 얼마 못 읽었다고 대충 얼버무리다가, 나중에는 오빠가 집에 오는 것조차 부담스럽게 여겨졌고,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큰 스트레스를 받은 나머지 삼국지 전집을 몰래 버리는 기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너무 큰 행복이나 너무 큰 불행은 망각하게 된다고, 나는 내가 저지른 이상 행동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그 이후의 기억이 삭제되었고, 삼국지 폐기 사건 이후로 친하게 지내던 사촌 오빠와 서먹해진 것 같았다. 사촌 오빠는 서울대와 포항공대를 동시에 합격했나 그랬고, 서울 지하철 2호선을 설계하는데 참여했다고 했나 그랬고, 미국에서 엄청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고 전해 들었으며, 오빠의 유머인지 진짜인지 모르겠지만 세계적인 어떤 중요한 기밀을 담당하는 몇 명 안되는 인재라고 했다. (모두 다 너무 오래 된 기억이라 정확도는 엄청 떨어질 것 같다.)
그건 그렇고, 수십 년이 흘러 내 인생의 한 모퉁이에서 사촌 오빠가 다시 나타났다. 내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유일한 엄지 손가락으로 등장한 것이다. 생존 신고처럼 글을 올리기는 하지만, 이웃과 소통 하지도 않고 관리도 되지 않아 좋아요가 아무도 없는 내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꾹 눌러주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나에게 삼국지 전집을 물려준 사촌 오빠다.
지금 내 앞에, 내 옆에, 내 뒤에, 나를 둘러싼 모든 곳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책이다. 내 방에는 이불과 책 밖에 없다 할 만큼 나는 온통 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나는 아직도 삼국지를 읽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렇게 두꺼운 전집 삼국지를 읽게 될지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책의 즐거움에 푹 빠져서 그게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혼자 킥킥거리고, 자기가 몇 번이나 읽고서 너덜너덜해진 책을 물려주며 얼마나 읽었는지 물어보던 사촌 오빠의 모습으로 인해 책은 나의 상처로, 영원한 동경으로, 미해결 과제로 남았다.
오늘 나는 기억을 편집하려 한다. 난독증으로 책을 싫어했던 아이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책을 사랑했던 아이로 나를 기억하려고 한다. 너무나 읽고 싶었지만 읽어지지 않는 괴로움으로 몰래 책을 버리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사촌 오빠와 멀어졌던 어린 나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싶다. 나는 나의 난독증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것을 잃었고, 뒤늦게 책 읽는 즐거움을 탐독하게 되었고, 책 읽는 남자를 연모하고, 밤마다 작고 네모난 것, 책을 꿈꾼다.
일년 중에는 낮 못지않게 밤도 많고, 낮의 길이 못지않게 밤의 길이도 존재한다. 행복한 삶도 어둠이 없으면 있을 수 없고, 슬픔이라는 균형이 없으면 행복은 그 의미를 잃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