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라이너> 18화.
어떤 모임에서 '일주일 후에 죽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모둠 나눔을 한 적이 있었다.
중복되는 내용 없이 다양한 답들이 쏟아졌지만, 대충 카테고리가 지어지는 답들이었다.
먹고 싶은 것을 먹겠다. 못 가본 곳에 여행을 가겠다. 있는 돈을 다 쓰겠다. 어릴 적에 살던 동네에 가보겠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겠다. 용서를 구할 사람을 찾아가겠다. 자신이 죽었을 때 집에 올 사람들을 생각해서 집을 청소하겠다. 와 같은 류의 대답들이 많았다.
그중에서 나에게 왠지 가장 정답처럼 느껴지는 대답이 있었는데, '그동안 쓴 글들을 정리해서 책상 위에 올려놓겠다'는 말이었다. 그 대답을 하신 분은 초등 교사로 젊은 남자 선생님이었는데, 그분은 이 대답을 할 때뿐 아니라, 어떤 주제든지 확고한 자신의 신념을 내 비쳤고, 사소한 일이든 큰 일이든 갈등하거나 번복하는 등의 흔들림이 없었다. 그랬기에 나뿐 아니라 다른 분들도 이 선생님의 의견을 주의 깊게 들었고, 그분이 안 오시기라도 하면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곤 했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닌데 그분의 말은 꼭 정답인 것 같이 여겨졌고, 내 답이 틀린 것처럼 눈치가 봐졌다.
어떤 결정을 하든 안정감이 느껴졌고, 내 안의 작은 자석이 그분의 큰 자석에 끌려가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알게 됐다. 나도 그분처럼 그렇게 자신감 있고, 확신에 차고, 당당하고, 여유 있고, 정답인 것처럼, 안정감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런 자세나 태도는 나도 '언젠가는'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런 '척 하기', '되기 연습'으로 '이미' 있는 일부를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자신의 뿌리로 지탱하면서 꿋꿋하게 서있는 나무에 생명체들이 모여들듯이 흔들림 없이 안정감 있게 버티고 있는 존재에게 의지가 되고 신뢰감이 생기는 법이다.
그 이후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쉽게 결정을 못하고 갈등이 될 때, '일주일 후에 죽는다면?'을, 시행착오를 줄이고 조금 더 빠르게 일을 진척시킬 수 있는 좋은 질문으로 활용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그 선생님과 같은 대답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쓴 글들 중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글들을 모아놓고 죽겠다'는 생각이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잘 살기 위함이고, 죽음을 가정해 놓고 보면 현실을 보다 생생하게, 진지하게 임하게 된다.
다음 주에 인쇄 감리를 보러 서울에 가기 위해 KTX를 예매해 놓고, 뭔가 비장해져서 죽음까지 들먹거리게 되었다. 인쇄를 하게 되는 이 시점에서 진짜 글을 잘 쓰고 싶다는 마음이 쑤욱 자라난다. 다음번에는 더 잘 쓰고 싶다는 소망이 여물고 있다. 일주일 후든, 수십 년 후든, 죽기 직전에도 아마 '다음번에는 더 잘하고 싶다'는 열망의 씨앗을 뿌리고 죽어가게 될 것이다. 좋은 씨앗을 뿌릴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