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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Sep 13. 2024

잘했군, 잘했어!

-<종이 놀이터> 19화. 수퍼마켓 콰이엇북




오늘 가지고 온 영상은 스톱모션을 발견하기 전, 종이 놀이를 하면서 만들어본 수퍼마켓 콰이엇북이다. 종이인형놀이는 어릴 때 언니랑 제일 많이 했던 놀이다. 공책 표지에 대문을 그리고, 한장 넘기면 현관, 또 한장 넘기면 침실, 옷방, 욕실, 주방... 각각의 다른 기능을 가진 방을 그려넣어서 종이 인형집을 만들어서 놀았다. 인형집, 학교놀이, 병원놀이, 시장놀이...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끝없는 시리즈를 만들어내며 잘도 놀았던 자매였다.



오랜만에 서울 언니집에 다녀왔다. 15년간 해외에 살다가 올해 1월에 서울에 다시 온 언니 집에 처음 간 것이었다. 먼지 하나 없이 정갈한 화이트 하우스에 크기별로 잘 정돈된 나무 도마들, 용도별 칼들, 층층이 쌓인 냄비들이며, 거실 한켠에 서 있는 다리미대와 다리미, 스프레이 물통으로 이루어진 다림질 존, TV장 서랍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의료용품들, 식탁 옆 장 위 바구니 안에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각종 영양제, 발코니에 있는 많지도 적지도 않은 초록 식물들, 플라스틱, 비닐, 스티로롬, 캔, 종류별로 분류가 잘된 재활용 쓰레기들, 색깔 빨래와 흰 빨래로 구분된 빨래 바구니, 일정한 모양으로 접어둔 욕실장 안의 수건들... 나름의 알고리즘으로 분류된 모든 살림살이들이 적재적소에 비치되어 있는 모양새에서 차분한 힘이 느껴졌다.



요즘의 나는 길을 걸을 때, 재래 시장 골목을 통과할 때, 대중 교통 안에서, 어디에서나 삶의 스트레스를 견디며 자기 자리를 지켜가는 사람들의 강인한 생활력에 새삼 놀라곤 한다. 각자 나름의 사연과 사정으로 다른 형태의 삶을 살면서 직장을 잃기도 하고, 일을 지속하기도 하고, 직업이나 직종을 바꾸기도 하고, 인간 관계를 이어나가기도 하고, 단절하기도 하는 다채로운 모습 모두가 각자 저마다의 최선으로 균형을 잡으면서 살아가는 모습의 단면들로 보인다.



지금보다 철이 없을 때, 나보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을 다녔던 언니가 커리어를 쌓지않고 전업 주부로 사는 것이 안타깝게 여겨진 적이 있었다. 나는 한번도 쉬지않고 목숨 걸고 일을 이어나갔다. 그때는 내가 옳은 것 같고 언니가 틀린 것 같았다. 세월이 지나 나는 가정을 지키지 못한 모습으로 보여졌다. 나는 가정을 지키지 못하고 잃은 것이 아니라, 내 삶의 혼돈을 인식하고 내적인 질서를 잡기 위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언니 역시 전공을 살리지 못하고 커리어를 지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전쟁터 같은 삶 속에서 혼돈과 싸우고 질서를 잡으며 삶을 지켜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거울을 보듯이 보였다.



각자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우연과 인연을 매개로 다른 방식의 삶을 전개해 나갔기에 드러난 모습은 상반된 것 같아 보이지만, 모두가 흔들리는 터전에서 삶을 향해 필요한 질서를 찾기 위해 분투해온 시간들의 총합은 동일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이들 다 키워놓고 방송통신대에 다니는 언니는 새로운 전공으로, 새로운 삶에의 기대로, 새로운 활력을 찾은듯 보였다. 그런 언니와 수다를 떨다가 언니의 내공에 심장을 강타 당했다. 이만큼 살아보니 부부 관계는 '잘했군, 잘했어'라는 노랫말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잘했군, 잘했어'라니!!! 전국노래자랑에서 들어본 그 옛날 가요?



젊었을 때 많이도 싸우고, 트남이며 중국이며 해외 생활을 15년을 하고 돌아온 언니는 나이 들어가면서 부부 사이에 대해 갖게된 지혜를 이 놀라운 노랫말을 통해 들려 주었다. 마음에 들든 안들든 무조건 '잘했다'고 해주면서 늙어가자는 혜안을 갖게된 언니 부부가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경이롭기까지 했고, 이 충격은 부산행 KTX 안에서 까지 여운이 지속되었다. 




1.

영감 왜불러 뒷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쌍을 보았소

보았지

어쨌소

이몸이 늙어서 몸보신하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2. 

마누라 왜그래요 외양간 매어놓은

얼룩이 황소를 보았나

보았지

어쨋소

친정집 오라비 장가들 밑천에 주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마누라지


3.

영감 왜불러 사랑채 비워주고

십만원 전세를 받았오

받았지

어쨌소

방앗간 채리려고 은행에 적금을 들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4. 

마누라 왜불러요 딱정내 마나님이

술값의 독촉을 왔었나

왔었죠

뭐랬나

술병을 고치려고 지리산 약캐러 갔댔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마누라지





수퍼마켓 콰이엇북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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