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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렌 Nov 21. 2024

꼴찌에게 갈채를

-<작가님 글도 좋아요> 29화. 롤랑 바르트




오늘 소개할 글은 2019년 코스미안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작품 박광희의 <꼴찌에게 갈채를>입니다.

박광희 작가님은 서고에서 잠자던 먼지 쌓인 헌책에서 롤랑 바르트의 글을 접하면서 꼴찌에 대한 롤랑 바르트의 탁월한 식견에 감탄하며, 무위無爲와 자유, 평등에 대한 사유로 초대합니다.




롤랑 제라르 바르트(Roland Gérard Barthes, 1915년 11월 12일 ~ 1980년 3월 26일)는 프랑스의 철학자, 비평가



꼴찌를 생각한다. 꼴찌를 누구이고, 어떤 존재인가? 학교에서든 사회에서든 그들은 존재해왔고, 세상의 무수한 시험에서도 자리해왔으며, 경쟁이 있는 곳 어디에서나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당위적 존재였다. 삶에 있어서, 생각에 있어서 꼴찌라는 개념조차도 생소한 사람이 있을 것이며, 꼴찌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트라우마가 되며, 삶이 그것으로 점철된 사람에게는 무덤덤함이며 삶 자체일 수 있을 것이다.



꼴찌를 생각한 계기는 오래된 낡은 책 때문이다. 세련된 디자인과 최신 콘텐츠를 담은 수많은 책이 쏟아져 나오는 때에, 낡고 못생긴 헌책은 꼴찌와 마찬가지로 생각에서 벗어나 있으며, 무시당하기 일쑤이고 곧 폐기되어 쓰레기통에 버려지거나, 형편이 낫다면 중고서점에서 헐값에 팔리기에 십상이다.



서고에서 잠자던 먼지 쌓인 책으로부터 어느 날 꼴찌가 내게 왔다. 오래 전 시사영어사에서 발행한 문고판 <영한대역문고 100>을 다시 펼치게 된 것은, 꼴찌를 바라보는 롤랑 바르트의 탁월한 식견 때문이다. 꼴찌에 관한 글은 <36인이 말하는 21세기 세계>에 실린 '무위는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Dare to Be Lazy'에 담겨있다. 이 글 속에서 프랑스 비평가이며 작가인 롤랑 바르트는 노동과 생산의 굴레에 갇힌 현대인이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선적인 무이념無理念, 무행無行, 무위無爲를 행해햐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깊은 통찰력으로 꼴찌의 존재를 무위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바르트의 철학은 경쟁 사회에 찌든 현대인에게 색다르고 신선한 관점을 제공한다. 바르트는 현대 생활에 있어서 무위가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장자의 무위無爲의 도를 그가 설파하고 있음이 참으로 신기롭다. 그의 물음은 현대의 삶에 무위idleness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또 모든 사람이 여가활동에 대한 권리를 논하면서도 정작 게으를 권리(무위)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바르트는 계속해서 묻는다. 현대 서구 세계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Doing nothing이 과연 존재하느냐고. 자신과는 전적으로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 즉 좀 더 소외되고, 어려우며, 힘겹게 사는 사람들조차도 한가한 시간에 아무것도 안 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드시 뭔가를 한다는 것이다.



그는 파리의 카페 거리를 떠올리며, "카페는 여유로움이 깃드는 한가로운 정경을 연출한다. 카페는 일종의 한유이다. 그러나 부산물이 있다. 거기에는 대화가 있음으로써, 활동의 모습을 띤다. 진정한 무위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바르트는 무위의 상태에서 주체로서의 일관성을 상실하고, 중심이 해체되어 '나'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몰아지경에 있는 상태가 진정한 무위라고 말한다.



따라서 진정한 한유는 '근본적으로 결정하지 않음Not deciding, 그곳에 있음Being there이 되는데, 바르트는 꼴찌의 존재를 이러한 차원에서 조명한다. 학교에서 밑바닥을 치는 아이들, 교실에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특징이나 개성, 존재감을 가지지 못하는 열등한 아이들, 그들은 교실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배제되어 있지도 않다. 그냥 주목을 받지 않고 의미를 두지 않는 존재로서 그곳에 있다. 그것이 바러 우리가 때때로 바라는 상태임을 바르트는 직시한다. 아무 것도 결정함 없이 그냥 그곳에 있는 것Being there, deciding nothing이다.



문제를 좀 더 확장해볼 때, 무위는 악의 문제에 대한 철학적 해결책으로 간주해도 좋다고 바르트는 말한다. 답하지 않는 방식은 그동안 불신 되어 왔는데, 현대 사회는 중립적 태도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며, 한유를 받아들일 수 없는 최고의 악으로 간주한다.



자칫 무위는 세상에서 가장 낡은 것, 가장 지각없는 종류의 행위로 인식될 수 있으나 사실 그것은 가장 사려 깊은 행위일 수 있다. 이점에 있어 무위의 부정적 측면에 관한 바르트의 고찰은 매우 날카롭다. 예를 들어 빅토리아 조의 영국이나 정통 유대교의 매우 경직된 율법화된 사회에서는 휴식의 날이 어떤 행동들을 금하는 법규들로 규정되어 있다. 이러한 법규들은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자 하는 욕망의 발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처럼 복종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이면 (즉, 무위가 외부로부터 강요되면), 그 즉시로 무위는 고통이 되고 만다. 바르트는 이 고통을 권태Boredom라 부른다. 쇼펜하우어의 표현을 빌자면, "권태의 사회적 표현은 일요일The social representation of boredom is Sunday" 이 되는 것이다.



학교 가는 것이 즐겁고 재미있는 초등학생이나 청소년들에게 일요일은 권태로운 날이다. 그러나 일상에 찌든 현대인들이라면 과종한 업무, 거래로 인한 스트레스, 직장 내 갈등, 성과 확대의 심적 부담 등 몸과 마음을 지치게 하는 일상으로부터 주말은 자유스런 날이며, 행복하고 게을러지고 싶고, 무위하고 싶은 날이 된다. 바르트의 표현을 빌린다면, "현대적 무위의 봉헌적 형식은 결국 자유The votive form of modern, after all, is liberty" 이기 때문이다.



경쟁 사회에서 필요한 존재인 꼴찌들,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꼴찌는 무존재의 존재이다. 그들은 찬란히 빛나는 양지를 떠받치는 음지와 같은 존재이며,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잡초 같은 존재로서, 무한한 인내심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존재이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조직(그룹)을 말없이 떠받치는 존재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고마운 존재다.



꼴찌가 홀로 서는 날, 그날은 경쟁 속에서 꼴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꼴찌가 꼴찌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생명을 얻으며, 꼴찌를 내려다보던 인생들이 열린 시각으로 평등과 존재의 소중함을 깨닫는 날이 될 것이다. 꼴찌는 무위한다고 하더라도 오로지 그의 특유한 역할과 가치를 지닌다. 지금껏 우리 사회에서 투명 인간이었으며,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고, 무시당하고 버려졌던 존재들이 생명을 부여받는 날이다. 무존재의 존재가 존중받고 가치를 인정받아 독립하는 날이다.



꼴찌가 홀로 서는 날은 경쟁보다는 평등이 자릴 잡고, 꼴찌들의 인내심과 게으름(한유)이 새롭게 조명 받으며, 무엇보다도 동등한 인간으로서, 한 조직(단체)을 묵묵히 떠받치는 '무존재의 존재'라는 가치로 그동안 상실했던 사랑과 존중을 회복하는 날이 될 것이다.




박광희 '꼴찌에게 갈채를'
<69프로젝트>
자연과 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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