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Oren's New Diary> #3
육체노동을 하면서는 먹는 것, 자는 것, 운동하는 것 즉, 신체의 조율에 유독 민감하고 철저해왔다. 그러지 않고서는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해논 시간에 잠자리에 들지 못하면 내일의 피로가 두렵고, 바쁜 낮 시간 동안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 두려워 저녁 시간에 영양을 보충하느라 끊임없이 먹어댔으며, 하루 종일 과도하게 앞으로 숙인 자세로 인해 늘어난 근육을 제자리로 돌려놓지 않으면 내일의 근육통이 두려워 하루도 빠지지 않고 헬스 케어에 매진했다. 그뿐인가? 힘든 상황에 처할 때 도움을 못 받을까 두려워 밥 먹자는 사람들의 요청에 순순히 응하기까지 했으니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시간적, 심리적 여유와 자유가 점점 줄어들어 어느새 피폐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2025년 12월 14일) 연말 회사 전체 회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매일 조금씩 읽고 쓸 때만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헛되지 않게, 충실하게, 내 삶을 살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는 내 브런치 작가 소개를 찾아 읽으며, 또, '진심으로 잘 지내기 바란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두 사람은, 시인인 너나 화가인 나는 인내와 용기와 힘과 끈기를 가져야 한다는 거야. 거듭 잘 지내기를 바라며, 치통이 없기를 바라고, 돈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내가 밤새 읽을 수 있도록 긴 편지를 보내주기 바란다.' 는 로베르트 발저, 산문집 <세상의 끝>에 수록된 '어느 화가가 어느 시인에게 쓴 편지(1915년)'를 읽으며, <오랜 일기>를 다시 쓰기로 했다. '나에게 필요한 건, 인내와 용기와 힘과 끈기, 거창한 무언가를 해내려는 치기보다 작고 분명하고 느리고 꾸준한, 구체적인 실천, 미하엘 엔데의 거북이, 트란퀼라처럼 누가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마음'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다 2025년 마지막 달 독서모임 책으로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으면서, 어떤 책을 읽을 때마다 일어나는 동시성의 강렬한 작용으로 방황했고, 일에 매몰되어 글을 쓰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바꾸기 위해 이직을 준비했다. 조금이나마 글을 쓸 수 있는 여건이 되는 회사를 물색했고, 운 좋게도 착착착 연결이 되어 면접까지 보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딱 지금 이 시점에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의 급여가 오르는 일이 발생했고, 잠깐 흔들렸으나 그래도 6펜스 보다 달을 쫓기로 마음을 굳히려 했다. 스스로를 행복하게 하고,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돈 보다 열정이고 글이고 예술이며 그것을 얻기 위해 지불하고 희생해야 하는 일부 불편감은 감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2025년 12월 20일) 달과 6펜스에서 읽은 문장, '내가 여기에서 얻는 가르침은 작가란 글 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를 곱씹으며 다시 마음이 바뀌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조금 더 여유로운 환경이 아니라, 현재 다니는 곳에서 장비 하나하나, 만나는 동료를 한 명, 한 명, 매일 노동으로 버는 돈 한 푼 한 푼, 그것으로 영위하는 삶 한 단면 한 단면을 더 살뜰하게 여기고 거룩함을 되찾는 것, 그로부터 흐릿한 정신을 맑게 하는 것, 맑아진 정신으로 내 안의 샘에서 단어를 길어 올리는 것' 이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다.
그로부터 또 20일이 훌쩍 지난 오늘 새벽, 잠에서 깨어났을 때, 단어 하나가 솟아올랐다. '용기!"
그리고 책장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용기가 들어간 책을 찾았고, 곧 롤로 메이의 <창조를 위한 용기>와 폴 틸리히의 <존재의 용기>가 손에 들려 있었다. 책장을 후루룩 넘겼을 때, 수많은 밑줄과 빼곡한 메모에 이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언젠가의 두려움 속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의 용기를 내었던 흔적. 아! 참! 여기까지 오는데 이토록 애를 썼지! '나 자신을 믿고 나에게 친절할 것', '두려움을 바라보고 용기를 낼 것', '시기와 맞서고 사랑을 선택할 것'. 과거의 내가 두려움 속에서 힘찬 필체로 써둔 깨알 메모들이 움츠러든 지금의 나에게 용기를 주고 있었다.
글을 쓰지 못한 20일간, 나는 다시 이직 문제를 재고했고, 팀장과 과장과 동료들에게 그 결심을 말할 용기를 냈고,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의 식사 요청을 거절할 것인가? 관계를 회복할 것인가? 고민했고, 미뤄둔 건강검진을 할 용기를 냈고, 악성이 의심되는 부위의 조직 검사를 용기 있게 받았고, 그 결과를 용기 있게 기다리고 있고, 번거롭고 귀찮아서 잘 안 해 먹고 주로 사 먹었는데, 휴일 날만이라도 제대로 음식을 해먹을 용기를 냈고, 오늘 아침, 한 시간의 잠을 글에게 양보해서 <오랜 일기>를 이어가는 용기를 냈다.
용기란 절망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절망하더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키에르케고르가, 니체가, 카뮈가, 사르트르가... 웬만한 철학자들이 다 그렇게 주장하지 않았던가. 젊을 때에 비해 더 필요한 미덕이 용기가 아닌가 한다. 성급함이나 열정으로 들이대는 것이 아닌, 진짜 용기로운 결정과 행동은 공허하지 않고 충만하며, 자족의 기쁨과 여운을 남긴다. 그런 기분을 위해 당분간 나는 '용기'에 대해 묵상할 것이다. 이 아침, '용기'를 기억해내게 하신 은혜에 감사드린다.
은혜는 우리가 엄청난 고통과 피곤함에 빠져 있을 때 밀고 들어온다. 은혜는 우리가 무의미함과 공허한 생애의 어두운 골짜기를 통과할 때 우리에게 다가온다. 은혜는 우리가 사랑하는 생명, 즉 그로부터 우리가 소외된 그 생명을 더럽혔기 때문에 우리의 분리가 예상보다 훨씬 깊다고 느낄 때 다가온다.
당신이 고통당하고 실패할 때 하나님께서 당신 편에 계심을 믿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와 상상력이 있어야 한다. 증오에 직면하여 사랑을, 죽음에 직면하여 생명을, 밤의 흑암 속에서 밝은 낮을, 악에 직면하여 선을 믿는 것, 이러한 모든 태도는 어떤 이들에게 절망적인 순박함으로 여겨지며, 간절한 마음으로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어둠 속에서 휘파람을 불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틸리히가 볼 때 그러한 모습들은 대단한 용기, 즉 사실과 외양의 강력한 힘을 넘어서는 확신의 용기였다.
은혜가 작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은 '그렇지 않다' 고 알고 있는 것을 믿는 것이 더는 아니며, 받아들이기 힘든 교회적인 선포의 모음도 아니다. 믿음은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의 용납을 받아들이는 용기이다.
거절과 죽음의 부정적인 세상 속에서, 용기는 틸리히가 말한 대로 비존재의 위험 속에서도 나타나는 존재의 자기 긍적이다. "이러한 긍정의 힘은 용기의 모든 행동 속에서 효력을 발휘하는 존재의 힘이다. 믿음은 이러한 힘의 경험이다."
'존재의 용기' 는 의심의 불안 속에서 하나님이 사라져 버린 때에 나타나신 하나님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폴 틸리히, <존재의 용기> 서문 중에서
은혜를 위한 믿음, 믿음을 위한 용기, 의심의 불안 속 존재의 용기
+아멘
(2026년 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