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장편소설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그야말로 설명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무언가 너무 많은 걸 봐 버린 느낌과 함께 이 책을 다시 펼치기가 겁이 났었다. 이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상황에서 문제만 계속 접하게 된다면 해답 역시 영원히 미궁 속으로 들어갈 게 뻔했다. 결국 내 입장에서 이해한 채식주의자는 세 이야기를 관통하는 중심인물인 ‘영혜’ 가 아닌, 마지막에 그녀의 곁에 계속 남아있는 ‘인혜’의 입장뿐이었다. 아니, 사실 이것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오로지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그녀가 계속 영혜 곁에 남아서까지 궁극적으로 지키려 했던 가치에 대해 설명하라 하면,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이 본질적으로 설명하려 했던 영역에 대해 조금도 가까이 하지 못했으며, 그런 자신의 무지함에 대해 너무나도 실망스러웠다.
그렇게 찾아간 사람이 나의 현재 문학적 소양에 도움을 주신 은사님이며, 그 분의 문학적 지식의 영역은 이미 내가 상상하는 그 이상의 범위까지 넓혀져 있는 상태에 있었다. 이상의 “날개” 에 대한 그분의 소견을 들었을 때 난 며칠을 제정신으로 있지 못했을 정도이니(이 이야기 역시 추후에 글로 쓸 예정이다), 말 다했다. 절대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까지 세밀하게 말로 묘사하는 그분의 어휘에 나를 포함한 여러 제자들은 이미 도취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 날 보지 못했던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였다. 지금부터 쓸 채식주의자에 대한 해석의 내용들은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 받은 내용들이며, 두고두고 다시 보면서 상기하고 싶게끔 허투루 쓰지 않으려 한다.
잠시 이 책의 줄거리에 대해 간략하게 서술하고 질문을 들어가고자 한다. 이 책은 표지에서 볼 수 있듯 연작 소설이며, 총 세 개의 이야기로 이뤄져 있고 이 세 이야기를 모두 관통하는 인물은 ‘영혜’라는 여성이다.
1부는 영혜의 남편의 시선에서 바라본 영혜의 이야기이다. 어느 날 영혜는 이상한 꿈을 꾸게 된 후 고기를 안 먹기로 선언하고, 집에서부터 시작하여 바깥까지 그의 남편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고집하게 된다. 고기를 안 먹는 것부터 시작하여 브래지어를 차지 않고, 공적이 자리에서까지 이 행위를 하면서 점차 이질감을 키운다. 끝내 그녀의 가족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녀의 행동은 계속되었고, 그 모습을 보며 분노에 찬 그녀의 아버지는 억지로 영혜에게 고기를 먹이려 든다. 그러자 그녀는 자해를 하고, 결국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남편은 말라가고 죽어가는 영혜를 더는 이해할 수 없게 되어서 이혼을 하게 된다.
2부는 영혜의 형부의 시선에서 바라본 영혜의 이야기이다. 사진작가인 형부는 영혜의 언니 인혜로부터 영혜가 몽고반점이 있다는 얘기와 함께 고기를 끊고 말라가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형용할 수 없는 환상에 빠진다. 그리고 그녀와 접촉하면서 점차 흥미를 느끼게 되고, 그녀의 몸에 꽃을 그리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는 얘기를 한다. 그러자 영혜는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다 점점 그의 예술적 욕망이 커지게 되고, 형부는 그녀가 꽃이 그려진 다른 남성과 섹스를 하는 모습까지 사진으로 찍고 싶게 된다. 하지만 남성은 도망가고, 홀로 남겨진 영혜의 모습을 보고 결국 자기 자신의 몸에 꽃을 그린 상태로 성관계를 맺는 영상을 찍게 된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이를 목격하게 되고, 결국 둘 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3부는 영혜의 언니, 인혜의 시선에서 바라본 영혜의 이야기이다. 인혜는 가족들조차 외면해버린 영혜를 홀로 간호하고 곁에서 챙기지만 영혜는 점점 나무가 된다는 둥의 얘기를 하면서 점차 이해를 할 수 없는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 영혜는 물구나무를 서는 둥, 햇빛만 받아 먹으면 된다는 둥 인혜를 힘들게 하는 말밖에 하지 않는다. 그러다 결국 거의 죽기 직전의 상태까지 이른 영혜의 몸에 링거를 꽂아서 그녀를 살리려 한 순간, 영혜는 발악을 하다가 큰 상처를 입게 된다. 결국 현재 있는 병원보다 훨씬 큰 병원으로 호송되고, 인혜는 그런 영혜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간다.
줄거리 요약만 봐도 정말 이해가 안 가는 점들 투성이다. 이 책의 작가 한강은 과연 이 소설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영혜가 나무로 되는 건 과연 무슨 의미였을까. 고기를 안 먹는 건 왜 그런 걸까. 한도 끝도 없는 질문들로 가득 차있는 이 상황에서 이제 그 비밀들을 하나 하나씩 헤쳐 나가볼까 한다.
.
.
우선, 이 책의 제목대로 영혜는 채식주의자인가? 아니다. 채식주의자의 일반적인 정의는 자신의 의식으로 본인의 식생활을 결정하겠다는 이성적인 행위, 즉 가치관의 문제와 결부된 신념이다. 그러나 그녀가 육식을 거부하는 모습을 묘사한 부분들을 보면 결코 이성적 행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유를 물어보면 오로지 “꿈을 꿨어” 로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대체 어디서 그녀의 이성적인 의식을 찾을 수 있는가. 여기서 잠시 그녀가 꾼 꿈들이 어떤 건지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어떠한 공장에서 영혜는 고기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걸 봤고, 그녀는 맨발에 흰 옷을 입은 상태로 고기를 뜯어서 먹고 있었다. 그리고 나와서는 어떤 가족들이 굉장히 행복하게 공원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모습을 숨어서 목격하고 있었다.
*누군가가 사람을 죽여서, 다른 누군가가 그걸 감쪽같이 숨긴다. 그때, 죽인 사람이 난지, 죽은 사람이 난지 영혜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 꿈은 수없이 많이 반복하며 꿨었다.
저 두 개의 꿈만 놓고 봤을 때는 그냥 일반적인 육식 행위에 대해 느끼는 혐오감으로만 치부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사실 이 두 개의 꿈은 곧 무의식의 결과이기도 하다. 영혜의 어떤 무의식이 저런 꿈들을 초래한 건지에 대해 굉장히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준 걸까. 그건 그녀의 현재까지 성장 과정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영혜는 굉장히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길러진 둘째 딸로, 위로는 언니 한 명, 아래로는 남동생 한 명이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굉장히 폭력적인 인물이었으며, 영혜는 셋 중에서 아버지의 폭력을 가장 많이 받음과 동시에 해소를 하지 못하면서 자란 인물이다. 첫째는 아버지의 식사를 차리는 입장으로서 폭력을 어느 정도 면할 수 있었으며, 셋째는 받은 폭력을 바깥에서 풀곤 하였다.
*그러다 영혜가 10살 때, 집에서 키우던 개에게 다리를 물린 적이 있었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는 그 개가 사람을 물었기 때문에 더 이상 키울 수 없다며, 밧줄에 묶고 오토바이에 매달아서 뒤의 개가 질질 끌려다니게 만들어서 목졸라 죽이게 만들고, 이 개의 고기를 사용하여 보신탕을 끓여서 먹었다. 그 때 영혜는 개가 애절하게 바라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개가 자신을 물었다는 사실에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그 개가 죽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개로 만든 보신탕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영혜는 그 뒤로도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받으면서 피해자라는 사고를 가지면서 마음의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가 물리적 폭력이었다면 영혜의 남편은 정신적 폭력을 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와 결혼하는 데 사랑을 염두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안정만을 추구했었다. 그리고 영혜는 여전히 자기 자신이 피해자라고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며 생활하고 있었다.
.
.
그런데, 어느 날 자기가 만든 고기 음식에 그녀의 실수로 인해 칼날 조각이 들어가게 되었고, 영혜의 남편은 그걸 잘못하고 씹어서 순간 상처를 입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고, 앞서 언급한 꿈들을 꾸게 된다.
.
.
.
영혜는 지금껏 자기 자신이 폭력의 피해자라고만 생각했는데, 칼날 사건으로 인해 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거나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또 폭력을 가할 수도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버리고, 고기와 관련된 그 모든 것이 바로 자신 안의 폭력성을 상기시키는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기와 관련된 행위들을 모두 멈추게 된다. 그렇다.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 행위는 영혜의 선택이 아니었다. 선택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있을 때 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영혜는, 그런 게 아니었다. 영혜는 그럴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 것이다.
하지만 영혜 역시 누구보다 고기를 좋아했다. 어릴 적 보신탕을 맛있게 먹은 그녀의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그녀의 육체는 고기를 먹고 싶다는 충동이 아직까지 있었다. 책에서는 영혜가 밤새 고기를 모두 꺼낸 냉장고 문을 연 채로 서 있는 행위에 대해 묘사되어 있는데, 이때 그녀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이는 그녀의 육체적 본능과 정신적 본능이 충돌하고 있는 순간과도 같다. 그래서 밤새 서 있었고, 남편이 목격했을 때 그녀는 싸움을 계속 지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탈진 상태에 놓인 것이다.
.
.
1부 마지막에서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있는 데도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은 채로 젖꼭지를 드러낸 상태로 바깥에 앉은 채로 살아있는 새를 산 채로 뜯어먹고 있었다. 이는 여자의 젖가슴이 자식에게 젖을 먹여 키우는, 생명이 가능하게 하는 수단으로, 자신의 안에 존재하는 폭력성과 가장 대비되는 부위였기 때문이다. 즉, 영혜가 가장 추구하고 있는 대상이었기 때문에 이를 가둬놓을 수 없었기에 브래지어를 지금껏 착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육체는 고기를 먹고 싶다는 욕망이 극도로 높아져서 기어코 고기로 이뤄진 대상을 뜯어먹는 행위를 저지르게 된다. 결국 영혜는 감각적으로는 가장 충족감을 느끼면서 정신적으로는 가장 힘든 순간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
.
결국 1부 마지막에서, 그녀는 결심한다.
이게 인간의 본성이라면, 나는 인간임을 포기하고 싶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이야기가 어떤 이야긴지 알 수 있다.
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질문이다.
.
.
2부에 들어서면서 영혜의 형부가 등장하는데, 이 인물은 보다시피 비뚤어진 예술가의 욕망에 사로잡힌 자이다. 자신의 처제의 몸에 꽃을 그리고 섹스를 하고 촬영하는 것이 얼마나 질타를 받는 행위인지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의 욕망이 이를 사로잡은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묻는 질문이 있다.
영혜는 왜 이를 받아들였을까.
1부 마지막에 영혜는 자신의 폭력의 욕망에 굴복을 해 버렸고, 인간임을 포기하고 식물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마침 그녀의 형부가 그녀의 몸에 꽃을 그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의 머릿속은 아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꽃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개화를 하기 위해선 꽃씨를 뿌리되, 암술과 수술이 만나서 수정을 이뤄야 한다. 즉, 꽃은 식물의 입장에선 성기와 같다.
영혜가 자신의 몸에 꽃을 그리고 섹스를 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건 그야말로 그녀 입장에선 식물이 되는 순간과 같다. 자신이 가장 원하던 순간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기에 형부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는 형부의 몸에 식물이 그려지지 않았을 때는 거부했지만, 그의 몸에 꽃이 그려졌을 때는 괜찮다는 그녀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섹스를 하는 순간이 꽃과 꽃이 맞닿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곧 본질적으로 식물로써 재탄생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영원히 폭력을 휘두르지 않는 식물이 되었다.
하지만, 과연 영원히 없어졌을까.
.
.
3부에서 영혜는 나무가 되어 있었다. 영혜는 형부와 이미 식물로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가장 행복한 상태로, 자신을 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인혜의 표현을 빌리자면, 영혜는 못 먹어서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든데도 그 몸으로 물구나무를 서면서 여태껏 보지 못한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는 영혜가 폭력을 경험하기 전 가장 순수했던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즉 그녀는 그녀의 몸에 아예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과 같다. 물구나무를 선 이유는 자신의 꽃을 피워야 하는데, 꽃이 그려진 부분이 자신의 몽고반점 쪽 자신의 음부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혜는 폭력의 피해자라고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살았지만, 자기 자신이 가해자라고 인식한 순간 이를 혐오하고 끊임없는 전쟁과 갈등을 치르면서 그러한 폭력성을 제거하고 비폭력적인 존재가 되기 위해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저지르면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이 광경을 보라. 영혜는 폭력성을 끊어내기 위해 스스로 식물이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을 죽이고 있다. 즉, 이 행위 역시 한 생명에 대한 폭력으로 인지될 수 있다. 또한 영혜의 행위 역시 주변인, 특히 인혜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폭력적인 행위이다. 그녀의 삶을 망가뜨리는 데 일조하는 가장 큰 원인이다.
.
.
그렇다. 아무리 벗어내려 해도 결국 폭력은 존재하고, 원초적으로 존재한다.
.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질문에 대한 작가의 태도는 인혜의 모습에서 알 수 있다.
인혜는 폭력의 피해자이면서 폭력의 가해자의 모습을 둘 다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이전에 동생이 아버지에게 맞는 모습을 보면서 알게 모르게 안도감을 느꼈다. 즉 그녀 역시 방관이라는 간접적 폭력을 한 것이다. 또한 영혜의 아버지가 영혜에게 고기를 억지로 먹이려고 할 때 적극적으로 말리거나 가족을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간접적 가해자의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인혜는 영혜를 가학적으로 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죽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지도 않다. 안타까워하고, 곁에 있어준다. 그리고 여태껏 1, 2부에서 화자를 ‘그는’이라고 썼지만 3부에서만큼은 ‘나는’ 이라고 쓴다. 결국 작가는 인혜의 시점과 동일시되는 자신의 시점을 보여준 것이다.
.
.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
인간 내면의 폭력성을 버티고 견디는 것.
그것이 이 이야기를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아닐까.
좋은 이야기는 구하는 법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강 역시 이 소설에서 그저 지켜만 볼 뿐이다. 결국, 궁극적인 해답은 우리들의 결정의 몫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이토록 무섭고도 슬픈 결말을 가진다는 것을 안다면, 조금 힘들더라도 부정하지 않는 자세를 지니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
.
"내가 믿는 건 내 가슴뿐이야. 난 내 젖가슴이 좋아.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무엇이든 죽이고 해칠 수 있는 무기잖아. 하지만 가슴은 아니야. 이 둥근 가슴이 있는 한 난 괜찮아. 아직 괜찮은 거야. 그런데 왜 자꾸만 가슴이 여위는 거지. 이젠 더이상 둥글지도 않아. 왜지. 왜 나는 이렇게 말라가는 거지. 무엇을 찌를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