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전이 없어서 조용하고 행복한 우리 집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다. 나와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다. 신혼살림을 채우기 위해 목록을 정할 때 남편에게 텔레비전에 대해 물어봤다. 사실 나는 텔레비전 보는 시간을 별로 안 좋아해서 자취집에도 놓지 않은 터였다. 그래도 결혼생활은 함께 하는 것이니 상대의 취향도 존중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의외로 텔레비전에 시큰둥했다.
“텔레비전? 나 그거 없어도 되는데.”
“정말?”
“응. 나 텔레비전 안 봐. 가끔 광고 보는 건 재밌는데, 5분도 안 봐.”
“나도 텔레비전 안 좋아해. 그렇지만 가끔 올림픽이나 월드컵 할 때는 조금 아쉽기도 해.”
남편은 여기에 한층 더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나 올림픽이나 월드컵도 안 보는데. 재미없어.”
남편의 말에 나는 짝짝짝, 박수를 쳤다. 둘 다 원치 않는 텔레비전은 구입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텔레비전을 놓을 자리에 책장을 놓기로 합의했다.
물론 내가 방송을 아예 안 보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정해진 시간 동안 어딘가에 눕거나 앉아 시선을 하나에 고정하는 게 어렵다. 프로그램 하나를 보는 한 시간 정도를 앉아있기도 싫고, 내가 내키는 시간에 조금씩 끊어 보고 싶다. 프로그램은 침대 위든 서재든 내가 원하는 장소에서 보고 싶다.
특히 제일 싫은 건 습관처럼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다. 결혼 전 집에서는 식구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집에 돌아오면 텔레비전부터 틀었던 것 같다. 아마 고요한 집에 인기척을 내기 위해 틀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게 좋은 목적으로 켰다 해도 습관이 되면 일상의 군더더기가 된다. 조용히 있어도 되는 시간에 끊임없이 깔깔거리는 소리, 무슨 내용인지 관심도 없는데 무심하게 바라보는 화면, 다같이 모여 멍하니 쳐다보는 재미없는 스포츠, 식구들끼리 프로그램 취향이 다르면 그야말로 전쟁터.
그럴 바엔 아예 없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늘 생각해왔다. 그랬던 차에 남편과 뜻이 맞아 텔레비전을 놓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부부란 살면서 맞춰가는 것도 있지만, 서로 맞는 사람끼리 만나 관계를 엮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우리 부부는 텔레비전이 없는 집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다만 불편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끔 놀러 오는 가족과 친구들이다. 처음 내 신혼집에 와본 엄마는 좌불안석이었다. 엄마는 허탈해하는 목소리로 이런 말을 자주 했다.
“뭔가 적적하다. 조용~하니, 적적~하고. 허전~하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꿰어 차고 있는 엄마 입장에서 우리 집은 너무 적막했던 것이다. 엄마 주변에서 텔레비전 없는 집이란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 첫 신혼집에서 지금 집으로 이사 올 무렵에는 내게 넌지시 텔레비전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래도 식구들이나 친구들이 오면 좀 심심할 텐데, 조그만 거라도 하나 사면 어떨까? 아니면 이사 선물로 엄마가 하나 사주랴?”
“아냐, 엄마. 나는 텔레비전 없어서 좋아.”
“집들이라도 하면 다들 모이는데 심심하잖니. 이사하면서 하나 놓는 게 어때?”
“집들이 그거 몇 번이나 한다고 가전제품을 사. 난 텔레비전 싫어. 그리고 집들이 때 식구들이 모여서 심심해하는 게 더 이상해.”
없어서 좋다는데 억지로 사서 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기에 엄마는 길게 권유하지 못하셨다. 엄마 못지않게 다른 가족들도 텔레비전이 없는 우리 집에 적응을 못했다. 집들이에 왔던 형부들은 식사 후 몸 둘 바를 몰라했다.
혹시나 적막할까 봐 계속 음악을 조그맣게 틀어놓긴 했는데, 귀로 들리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애매했던 모양이다.
“처제, 텔레비전이 없으니까 신기하다.”
“그러게, 특이하네. 좀 허전하고. 허허.”
텔레비전이 없으니 형부들은 굉장히 심심해했다. 가족끼리 모이면 좋은 음악을 듣고 대화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모두 이렇게 즐길 수는 없는가 보다. 텔레비전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겐 우리 집이 어색할 수 있다고 이해한다.
어색한 것은 어린 조카들도 마찬가지였다. 집에서는 언니가 텔레비전 시청을 제한하니 친척집에 가면 만화를 신나게 볼 기회를 노리는 조카들이다. 우리 집에 오면 조카들은 텔레비전을 찾아 헤맨다.
“이모, 왜 텔레비전이 없어요?”
“이모, 왜 만화 없어요?”
엄마나 형부들의 적적함은 아무렇지 않게 대응할 수 있는데, 조카들의 이 물음에는 시원하게 대응하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텔레비전이 없고 놀잇감이 없는 우리 집은 조카들에게 재미없는 절간 같은 곳일 것이다.
“글쎄, 왜 없을까?”
어색하게 마무리하며 심심해하는 조카들을 달래다 보면 하나 살걸 그랬나 싶다가도, 우리 부부가 쓰지 않는 물건을 부러 들이는 것은 영 내키지가 않는다.
그래도 요즘 신혼부부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리처럼 텔레비전을 사지 않는 집이 꽤 많은 것 같다. 꼭 보고 싶은 프로그램은 유료 스트리밍으로 보거나 핸드폰을 이용하면 되니 굳이 사지 않는 실용적인 부부가 있고, 혹은 멍하니 텔레비전을 쳐다보는 모습에 질려버린 나 같은 사람도 많은 모양이다.
그런데 텔레비전이 없는 이유로 가끔 놀림을 받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남편이다. 텔레비전을 안 좋아하기도 하지만 연예인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남편은 아직도 아이유와 김태희의 얼굴을 구분 못하고, 아이오아이와 에이오에이가 같은 걸그룹인 줄 안다.
지난번에는 남편의 회사에서 바뀐 사원증의 예제를 공지했는데, 예제에 사용한 사진이 ‘설현’이었다고 한다. 설현의 얼굴을 처음 본 남편은 신입사원인 줄 알고 동료에게 “김설현이 어느 팀이냐”라고 물어봤다가 한동안 놀림을 받았다.
어제는 남편이 튼 음악이 좋아서 가수가 누구냐고 물어봤다. 남편은 핸드폰 화면을 잠시 보더니 ‘지온’이라고 말했다. 지온? 아무리 검색해도 이 노래가 안 나온다. 남편이 다시 스펠링을 불러줬다. 자이언티(Zion.T)였다.
“여보, 아무리 텔레비전이 없다 해도 이건 좀 너무하네. 이 사람은 지온이 아니라 자이언티잖아. 텔레비전 안 보는 나도 이 정도는 알아.”
“오, 여보는 역시 나보다 아는 게 많아!”
내 남편은 참 해맑기도 하지. 그래도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함께 듣고, 색색의 화면을 멍하니 보는 대신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어 행복하다. 앞으로도 텔레비전이 없어서 조용하고 행복한 우리 집이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