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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Feb 18. 2018

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 황선미

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 를 읽고 있습니다.

지난번 누군가의 피드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몹시 마음에 들어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자고 제안했다. 다음 모임을 앞두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는데, 생각보다 꽤 두툼하다. 하지만 그 두툼함이 피곤하거나 지루하진 않았다.

모든 글이 좋았다. 가을 햇빛에 잘 마른 낙엽 밟는 소리가 책에서 흐르는 것만 같았다. 책 사이사이 들어있는 삽화가 나의 눈길을 쓰다듬었다. 어떤 연관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읽는 내내 존경해 마지않는 박완서 선생님이 떠올랐다.


나는 내 가슴에 깊고 커다란 구멍이 있다는 걸 안다. 그건 평소에는 바늘이 찍은 점처럼 희미하지만 너무나 외로울 때면 등쪽을 시커멓게 뚫어버리고 감당할 수 없게 시린 바람을 일으키는 구멍이다. 그 구멍에 내 엄마가 살고 있다. 5일장을 따라다니며 생선과 꽃게를 팔았던 엄마한테서는 늘 비린내가 났고 지문이 닳고 자주 피가 터져서 손가락에는 반창고가 친친 감겨 있었다. 28p.


이 단락에서 나는 엄마가 아할머니가 떠올랐다. 지난여름 나의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할머니는 수십 년간 연안부두 앞 어시장에서 가게를 하셨다. 할머니 덕에 생선만큼은 질리도록 먹고살았던 어린 시절, 가끔 할머니 가게에 가면 추워서 코가 빨개진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장례 중 염을 할 때 자손들이 모두 들어갔다. 할머니는 팔을 쭉 펴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일을 너무 고되게 하셨던 나의 할머니는 여러 차례 수술을 하셨어도 닳아버린 관절을 어쩌지 못하셨다. 사후세계를 믿지 않지만, 만약 아주 만약 그런 곳이 있다면 할머니가 팔다리를 시원하게 뻗고 씩씩하게 걸어 다니셨으면 좋겠다. 어시장 앞을 지날 때, 큰 시장의 생선가게 곁을 지날 때마다 나는 자꾸 뒤돌아본다. 코가 빨간 나의 할머니가 아직 앉아계실 것만 같다.


우리가 엄마와 딸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비껴갔을 텐데, 인연은 때로 너무 가혹한 것이라서 끝내 속을 파먹히는 아픔을 남기고야 만다.(중략) 미안하다는 말조차 못 하고 보낸 엄마를 오늘 시장 귀퉁이에서 만났다. 엄마한테 사랑한다고 말할 자신이 아직도 없다. 그러나, 엄마. 잘 계시나요. 28p


이제 60대에 들어선 엄마는 나와 늘 다정하지만은 않다. 그래도 나는 늘 엄마가 잘 계셨으면 한다. 그건 어쩌면 나를 향한 위안일지 모르겠다. 엄마가 아프면, 힘들면 나도 힘들 테니 말이다. 그게 가혹한 모녀의 인연이다. 우리 집에서 조금 멀어진 인천에서, 맞바람이 시원해 낮잠이 잘 오는 엄마의 집 안방에서도. 엄마가 늘 잘 지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때때로 우리는 시간을 도둑맞은 듯 억울해하고, 남은 시간이 얼마 없는 것 같아 두려워하고, 보낸 시간이 열정적이지 못해 후회도 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사는 동안에도 가끔씩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이런 시간들이 꽤 많았음을, 이런 시간들로 인해 우리의 지난날이 그래도 헛되지 않았음을 아는 게 중요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긍정하자면 말이다. 71p.


일을 시작한 게 12년 차다. 회사를 다닌 10년과 혼자 프리랜서로 일한 2년. 그럼에도 나는 아직 불안정하고, 이뤄낸 게 없는 것 같아 슬퍼지곤 했다. 도둑맞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는 다시 살 수 있다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었을까. 후회 없이 12년을 살았을까. 장담할 수 없는 작은 나를 다독여준 단락이었다. 

나는 매우 현실적인 사람이고, 삶은 리얼리티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벗어던질 수가 없지만, 그래도 가끔은 나에게도 놀라운 판타지 경험이 찾아올지 모른다고 상상한다. 내 귀와 눈 너머에 무엇이 숨어 있을지 어떻게 알겠나. 나는 우주적 지도의 부분이고, 삶은 놀라운 환상으로 가득 차 있는걸! 218p.


소소하게 농사를 시작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삶과 문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눈을 가진 감자 조각이 어두운 땅속에서 해내는 일보다 놀랍고 창조적인 예술이 얼마나 될까. 칼날에 쪼개진 몸을 스스로 치유하며 자라난 감자 줄기가 뽑힐 때 실핏줄로 연결된 크고 작은 감자들이 주렁주렁 딸려 나오던 광경은 내가 경험한 어떤 예술보다 경이로웠다. 244p.


가장 큰 두려움은 내 걱정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거다. 내 문제는 오롯이 나만의 것. 그래서 가끔, 나는 내가 위태롭다 느끼고 흠칫 놀라곤 한다. 나는 지금 작품 하나를 진행 중이다. 같은 자리에서 맥이 끊겨버린 오리무중 상태의 작품. 글이 안 써질 때는 그냥 쉬라고 사람들은 쉽게 말하는데, 창작이라는 건 불씨를 지켜야 한다는 심정으로 현재까지의 진행을 집요하게 붙잡고 늘어져야 답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를 뜯어먹으며 살고 있음을 실감하는 요즘이다. 292p.


나만 힘든 건 아닐까. 글 쓰는 삶이 다 그렇지, 하면서 힘겨운 2월을 보내고 있었다. 오랫동안 일해왔던 클라이언트와의 계약 만료가 연말부터 올초까지 이어졌다. 지금은 단기 프로젝트 몇 개에 참여하고 있으나, 길게 작업하는 일이 없다. 소속감이 없어서일까. 2월에 들어서면서 자꾸 초조했다. 


업계 특성상 분명 봄이면 새로운 청탁이 많아질 것을 안다.(봄부터 가을까지 원고 청탁이 많다.) 그럼에도 나는 너무나 쫄보라서 괴로웠다. 사람들이 날 잊으면 어쩌나, 습관처럼, 일상처럼 적는 필력이 죽어버리면 어쩌나, 불안했다. 


그런데 평소의 내 고독이, 불안과 수치가 중견작가에게도 여전하다는 사실에 놀랍고, 뻔뻔하지만 안도했다. 이분의 솔직함에 감사한다. 나는 힘을 얻었다. 


한 사람이 살아가는 여정은 매우 구체적인 발걸음의 연속이며, 어떤 지점에서 놀라운 문에 들어선다고 해도 그것은 '마법처럼 갑자기!'는 아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나에게 주문을 걸었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 나에게 벌어지는 모든 사건이 흥미롭다. 매우 사소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길 위의 어린아이이고, 저 너머의 세상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서 뒤보다는 앞을 보면서 간다. 366p.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댓글을 하나씩 읽게 됐다. 말도 안 되는 훈계는 넘겨버린다. 그렇지만 나의 부족한 타이핑에 눈물 지으셨다는 댓글, 따뜻함을 느꼈다는 댓글, 새롭게 소망을 갖게 되는 댓글은 여러 번 읽는다. 그렇게 과분한 응원을 받았으면서 나는 책 한 권 없는 작가라며 스스로를 몰아붙였다. 어쩌면 성과주의의 상자에 가둬둔 게 아닐까. 얼마나 못돼먹은 건지.


마음이 좁은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예전보다 독자를 향한 감사가 두꺼워졌다. 앞으로 쓸 이야기가 더 많아질 것 같다. 쉼 없이 공부하고 경험하고 확장해야겠다 다짐한다. 나아갈 앞날이 이토록 길고 넓은데, 스스로를 외나무다리에 올려둔 2월을 반성했다. 


<가끔, 오늘이 참 놀라워서>. 

놀라운 책 제목이다. 힘든 2월을 보내며 어제는 힘들었지만 오늘 나쁘지 않았고, 열심히 준비한 오늘로 내일 행복하려나 생각하지만 그건 또 확신이 없다. 그래서 오늘이 참 놀라운 거다. 오늘은 하찮은 시간이 아니다. 지금도 알 수 없는 내일이 떡 버티고 있다. 그래서 참 놀랍다. 경이롭다. 


남은 2018년의 10개월을 살아낼 힘을 얻은 귀한 책이었다. 덧붙여 작가가 언급한 동화책들을 하나씩 읽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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