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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절의 주부
by 귀리밥 Apr 11. 2018

결혼 전, 제주에서

나중에 은퇴하면 제주 와서 살아요.

결혼 전, 남편과 공식적(?)으로 첫 여행을 간 건 제주도였다. 연애하는 동안 남편과 여행이라고는 당일치기로 춘천이나 전주를 다녀온 게 고작이었다.

결혼 날짜가 잡히고, 결혼 준비를 하면서 집에서 조금 먼 곳으로 여행이 가고 싶어 졌다. 엄마에게 여행을 다녀와도 되는지 슬쩍 물어봤다. 결혼식이 코앞이라 그랬는지, 웬일로 보수적인 엄마가 여행을 허락하셨다.


“그래, 결혼 전이 자유롭게 여행하기 좋지. 좋은 추억 많이 만들고 와!”

이런 덕담까지 주셨다. 성인이 되고 나서도 늦게 들어오면 엄마에게 호되게 얻어맞곤 했는데, 이렇게 여행 허락까지 해주시는 걸 보며 내가 결혼을 한다는 게 실감 났다.


그렇게 준비한 남편과의 여행지는 제주도였다. 나는 제주도를 혼자 여행 말고 연인과 가게 된 것이 처음이라 굉장히 들떴다. 남편도 제주도를 오랜만에 간다며 여행 준비와 계획에도 열성이었다. 함께 올레길을 걷고, 제주도의 특산물을 먹어보고, 나부끼는 바닷바람을 느껴보자며. 여행 준비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했다.

이윽고 여행 날,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향했다. 예약해둔 콘도에 짐을 풀고 택시를 타고 첫 관광지로 이동했다. 그곳은 내가 드라마 <결혼의 여신>에서 본 뒤 꼭 가보고 싶어 했던 산굼부리였다. 온통 새하얀 갈대밭이 펼쳐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와 남편은 제주에 오길 참 잘 했다며 몇 번이고 감탄했다. 그 풍경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산굼부리에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택시를 타야 했다. 매표소 쪽으로 내려왔는데 도로가 휑했다. 매표소에 물어보니 전화로 콜택시를 불러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번호를 받아 전화를 걸었고, 잠시 후 택시가 도착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택시로 인해 시련을 겪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택시에 타고 목적지를 말하고 보니 미터기 화면에 기본요금이 아니었다. 5천 원이 조금 넘는 액수가 미터기에 기록돼 있었고, 달리는 내내 그 액수에서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콜택시를 부르면 콜비만 추가로 내는 것이 아니었던가? 의아한 가운데 택시 기사에게 여쭤봤다.


“저, 아저씨. 미터기 다시 누르셔야 하는 것 아니에요? 저희 탔을 때 오천 원 넘게 찍혀서 시작했거든요.”

백미러로 내 얼굴을 힐끔 쳐다본 택시 기사는 걸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주도는 원래 택시를 부르면 부른 장소까지 간 비용을 포함해서 돈을 내는 거예요.”


처음 들어본 해괴한 계산법이었다.

“콜택시니까 저희가 요금에 콜비를 합쳐서 드리는 것 아닌가요?”

“아, 젊은 사람이 참 말을 못 알아듣네. 제주도가 넓으니까 그런 거 아냐!”


안 그래도 걸걸한 택시 기사 목소리가 한층 더 굵어졌다. 옆에 있던 남편이 한 마디 했다.

“그러면 기사님, 저희가 전화를 걸었을 때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잖아요. 저희는 그런 계산법을 처음 들어봤어요. 그러니까 당황스러워서 여쭤본 건데 왜 언성을 높이세요.”

“아, 제주도는 다 그렇다니까! 그걸 뭘 설명해! 여긴 다 그런데!”


남편은 모처럼 나와 여행까지 왔으니 다투지 않고 돈을 조금 더 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걸걸한 목소리로 우리에게 버럭 대는 택시 기사가 몹시 불쾌했다. 결국 나도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아저씨, 그럼 길에서 타는 모든 택시는 도로를 달리는 동안 나온 돈을 손님이 다 내주나요? 그럼 도로에 오래 있던 택시 타면 손님은 엄청 많은 돈을 내야겠네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세요?”

“아가씨가 뭘 잘 몰라서 그런 소릴 하나 본데, 제주도는 원래 다 그렇다니까!”

“제주도가 원래 그렇다고요? 아저씨 말 대로면 제주도 택시는 다 바가지 씌운다는 거잖아요.”

“뭐라고?”

“아, 그런데 왜 아까부터 반말이세요?”

“아가씨가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릴 하잖아!”

“아저씨는 이상한 소리 안 하는 줄 알아요?”


택시 천정이 뚫어져라 나와 택시 기사는 소릴 지르고 싸웠다. 옆에서 남편은 식은땀을 흘리며 나를 말렸다. 폭발 직전 택시의 세 사람이었다.

이윽고 택시 기사는 자신의 권한을 사용해 가장 최악의 선언을 했다.

“내려!”

“내리라고요? 그럼 못 내릴 줄 알아? 대신 나 한 푼도 못 줘요. 그리고 아저씨 신고할 거예요!”


씩씩거리며 나는 택시에서 내렸다. 남편과 일단 내리긴 했는데, 세상에. 그곳은 울창한 숲으로 뒤덮인 고갯길이었다. 인도는 따로 없고 차도 옆에 아주 좁은 폭의 흙길이 있었다. 길이 아주 좁아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없어 나와 남편은 앞뒤로 서서 걸어야 했다.

당당하게 택시에서 내리긴 했는데 내가 괜히 싸우는 바람에 남편까지 고생시키는 것 같아 미안했다. 게다가 이런 불같은 내 성격을 본 남편이 결혼을 취소라도 하면 어쩌나 뒤에서 달달 떨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아, 나 오늘 차이는 거 아냐.


비를 맞으며 좁은 길을 걷고 있는데 우리 옆으로 작은 차 한 대가 따라오기 시작했다. 창문을 내린 조수석에는 중년의 여성이 있었고, 또래의 남성이 운전을 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여기 걸어 다닐 만한 길이 아닌데. 괜찮으면 우리가 태워줄게요. 어서 타세요.”

“우와! 감사합니다!”


얼른 뒷좌석에 앉은 우리는 금세 신났다. 중년의 여성과 남성은 부부였고, 서울에서 살다가 은퇴하고 제주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우리에게 어쩌다 이 길을 걷고 있었냐고 묻기에 부끄러운 싸움 과정을 설명했다. 두 부부는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게, 제주도에서 택시를 타면 그런 게 있긴 요. 서울 사람들이 여기서 택시 타면 당연히 어이가 없을 만하죠.”


두 분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오래 하셨다고 했다. 은퇴하고 제주에 내려와 재미 삼아 감귤 농사를 짓는 이야기, 제주의 날씨, 제주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셨다. 비를 맞아 싸늘했던 체온이 순식간에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우리를 목적지까지 태워다 주시고는 포근한 얼굴로 인사를 나눴다.

“제주 와서 살아보니 너무 좋아요. 두 분도 곧 결혼한다고 하니, 나중에 나이 먹고 은퇴하면 제주 와서 살아요. 사람 살기 참 좋은 곳이거든. 그럼 여행 즐겁게 해요!”


창밖으로 손을 흔들어주며 떠나는 두 부부의 근사한 모습을 우리는 한참 바라봤다. 제주도에 오자마자 얼음물 한 컵 들이켜 속이 냉랭한 가운데 따끈한 콘스프를 마신 느낌이랄까. 우리가 디딘 제주의 일부 땅바닥마저 포근하게 발을 감쌌다.


그날 저녁 우리가 먹은 메뉴가 무엇이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쨌든 첫날 여행을 마치고 식사를 하며 남편과 나는 어렴풋이 그 부부를 동경하게 됐다고 느꼈다. 남편이 먼저 이런 말을 꺼냈다.

“우리도 나중에 은퇴하면 제주도 내려와서 살까?”

“응! 좋아. 우리 먹을 정도만 농사지으면서 살자.”

“그리고 자기야.”

“응?”

“앞으로는 낯선 사람이랑 싸우지 마. 그건 위험한 거야.”

“응, 알았어….”


우리는 낯선 사람과 싸우지 않기로, 언젠가 제주에 가서 살자고 약속했다. 우리도 그 중년 부부처럼 따뜻한 어른이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밤의 별구경을 했더랬다. 바람 부는 제주의 하늘에는 별이 흐드러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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