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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May 20. 2019

눈물이 많아진 만큼

스물한 살의 소울 메이트는 이제 없다

“나이 드니까 자꾸 눈물이 많아진다. 너도 나이 들어봐라.”

언젠가 회사 선배가 내게 한 말이다. 눈물이 많아진다는 말처럼 눈물이 없다는 말도 추상적이긴 한데, 굳이 따지자면 나는 눈물이 없는 편이다. 어떤 감정을 마주해도 눈물로 풀어내는 게 어색해서 입을 닫아버리거나 나중에 글로 옮겨 감정을 푸는 게 익숙하다. 그래서 잘 우는 사람을 이해 못한 게 사실이다.


눈물이 많아진다고 얘기한 선배는 결혼 후 치이는 게 많아서 눈물이 많아졌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워낙 감정이 풍부하고 여려서 눈물이 많아 보였다. 그게 울 일인가, 싶을 때도 울었고 술자리에선 고정적으로 울었고, 감동적인 기사나 소식을 전하면서도 눈물짓는 선배를 보면 작은 인기척에도 반응하는 센서형 수도꼭지 같았다.


그게 벌써 20대의 기억이다. 인상적이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소소한 대화가 기억난 건 어제 친구를 만난 자리에서였다.  친구와는 벌써 열여섯 해를 함께한 사인데, 어제는 느지막이 오후에 만나 차를 마시고 맥주도 한 잔 걸쳤다.

사람 하나를 키워도 자아가 강건해질 세월 열여섯 해. 그렇게 긴 세월 교류하는 친구가 몇 있는데 그중에도 이 친구와는 세월의 풍력이 유독 강렬하게 느껴졌다. 한 때는 거의 매주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고, 서로의 이성 친구에 대한 고민도 탈탈 털어 보인 적 있고, 취향이 겹치는 뮤지션의 공연장에 함께 가거나 책을 바꿔보면서 돈독한 우정을 쌓아온 친구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친구와의 사이에 불편한 이물감이 느껴지곤 했다. 친구로 시작한 출발선상은 같았지만 다른 삶, 직업, 환경에 처하며 다르게 성장했기 때문이리라.


술자리에서 메뉴를 주문할 때도 그랬다. 20대에는 둘이 술을 마실 때 물어볼 것 없이 소주였지만, 이제는 내가 맥주 500밀리에도 쩔쩔매는 상황이 되자 친구는 자신이 마실 소주 한 병과 내가 마실 맥주를 주문했다. 각자 다른 잔에 술을 따르고 건배를 하는 모습이 술이라는 동질감과 소주와 맥주라는 이질감을 동시에 마시는 우리의 모습을 닮아있었다.


대화중에 나는 얼마 전 있었던 황당한 일을 털어놓았다.

“아무튼 그때 되게 어이가 없더라고. 내가 얼굴이 동그랗고 만만하게 생겨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게 아닐까?”

그랬더니 친구가 의외의 답을 한다.

“얼굴이 문제가 아니야. 네 20대 때 성격이 유지됐다면 아무도 널 만만하게 안 봤어.”


친구의 말로는 나를 처음 알게 된 20대 때와 지금의 내 성격이 너무 다르다는 거였다. 당시의 나는 거칠고 세상 무서울 것 없이 굴던 성격이었고, 그런 성격이 좋아서 친해진 건데 지금의 나는 너무 다른 사람이라고 했다. 나야말로 변해버린 친구의 성격이 버거웠는데, 친구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졌다.


“참내. 니 성격은 같은 줄 아냐? 내가 알던 20대의 너랑 지금의 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그랬더니 이번엔 친구가 움찔한다.

“내가 변했다고? 내가 어떻게 변했는데?”

몇 년째 느낀 걸 모조리 말할 수 없어 간단히 포장했다.

“20대 때의 너는 배려심 깊고 자유롭고 다른 사람들이랑 두루두루 잘 지내는 사람이었는데, 너 지금 되게 보수적이야. 뭔가 좁아졌어. 나 가끔 벽이랑 말하는 것 같단 말이야.”


내 말을 들은 친구가 적잖이 놀란 얼굴이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더 솔직한 생각을 하나씩 주고받았다.

“작년쯤? 아니면 조금 더 전부터 너랑 얘기하면 위험하다고 느꼈어. 이렇게 지내다 보면 너랑 연이 끊어질 것 같다고 느낄 정도로 대화가 안 .”

“나도 그랬어. 그래서 네가 이상한 소리 할 때마다 그냥 모른 척하거나 말 돌리고 그랬어. 계속 이야기하면 너랑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질까 봐 대화를 길게 못 하겠더라고. 그런데 그게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아.”


말을 꺼내놓고 나니 그동안 답답했던 감정이 깊은 곳에서 밀물처럼 떠밀려왔다. 그 감정은 눈물샘을 통해 몸 밖으로 뿜어져 나왔다. 술자리에서 우는 사람 보면 우스워했는데, 세상에 내가 울고 말았다. 테이블 위 오돌토돌한 냅킨에 눈물을 훔쳐냈다. 내가 느낀 이질감을 친구 역시 느끼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16년간 쌓아온 세월이 아프게 다가왔다. 우리는 그 오랜 시간만큼 변해가는 서로를 껴안는 게 참 어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그 긴 세월을 보내 놓고 오래전 친구의 모습이 그대로이길 바라는 게 욕심 아니었을까? 내가 더 이상 스물한 살의 내가 아니듯 있는 그대로의 우리는 사실상 사라졌다. 스물한 살의 소울 메이트는 확실히 상실됐다. 세월만큼 변한 친구를 받아들이고 그에 비례하게 변해버린 나를 친구가 인정하는 게 오랜 우정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숙제라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그 단순한 깨달음을 얻기까지 우리는 앞에서 드러내지 못하고 그 답답함을 속에 꿍쳐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긴 시간 지내면서 서로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을 용서하고 넘어갈 수 있는 힘을 키웠잖아.”

“나이 먹으면서 친구도 하나둘씩 잃게 된다는데, 우리는 그러지 말자.”

“그러니까 우리 서로 예민한 얘기 하지 말자. 특히 정치 얘기.”

“페미니즘 얘기도 하지 마. 그 얘기만 나오면 자꾸 부딪히잖아.”


꿍쳐놨던 감정을 털어놓고 해결책까지 마련하고 나니 방금 냅킨에 눈물을 찍었던 순간이 새삼 민망해진다. 술 마시던 선배가 울면서 냅킨에 눈물 찍을 때 속으로 흉봤는데, 똑같은 장면을 재현하고 있는 내 모습이 몹시 부끄러워졌다. 나이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더니, 바로 이건가?


울었던 티를 내기 싫어서 재빨리 코를 풀어버리고 남은 맥주잔을 들이켰다. 눈물이라곤 바짝 말랐던 내가 이렇게 우는 것도 엄청난 변화인데, 하물며 16년간 부대낀 친구와의 관계가 변치 않길 어찌 기대할 수 있을까?


얼마 전 여행지의 공원을 산책하던 중 해시계를 발견한 적 있다. 돌 위에 단단하게 박힌 해시계의 바늘은 늘 같은 자리에 고정돼 있고,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태양이었다. 나는 그 바늘처럼 같은 자리에 있다고 착각하며 살았을 테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쉬지 않고 움직이는 태양과 같은 존재이고, 그에 따라 변하는 그림자를 인정하기 어려웠던 시간이 있었다. 친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때 뾰족한 소리로 친구를 꼬집었던 순간들이 자꾸만 떠올라 내 못난 그림자가 자꾸만 밟히는 귀갓길이었다.


늦잠 자고 일어난 오후, 인스타그램에서 누군가 올린 시구에 마음이 동한다. 사랑을 논하는 시지만 친구와 서로의 옛 모습만 기대했던 모자란 날들과 닮아보여 여러 번 소리 내 읽어봤다.      


사람의 마음에 온도가 같을 수 없듯
내가 네게로 가는 몸짓으로
너도 그렇게 내게 오라 할 수 없겠지
사람이 사람을 욕심내는 일이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바보같이 욕심을 내었구나

송해월, 우울한 날의 사랑     


친구의 옛 모습을 욕심내던 나를 이제 고쳐야지, 모두가 변하고 있음을 받아들여야지, 하고 서운함이 헤집어놓은 마음을 주워 담는다. 베를린 장벽도 스스로 무너진 게 아니라 망치와 삽질에 힘이 실렸기에 가능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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