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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Jan 18. 2019

나의 동서

어쩌다 만나면 반갑게 맞이할 수 있는, 그런 동서

어쩌다 보니 맏며느리다. 얼굴이 동글동글 생긴 덕에 스무 살이 넘어서부터는 “얼굴이 딱 맏며느릿감”이라는 말을 곧잘 들었는데, 정말 맏며느리가 됐다. 남편은 친가와 외가를 통틀어 맏아들이었다.


친가로는 시아버지가 형제 중 유일한 아들이었고, 외가로는 시어머니가 장녀였다. 친가에는 모두 고모들의 자손인 데다 몇 있는 아들 중 내 남편이 첫 결혼이었다. 외가에는 딸이 귀했는지 자손 중 한 명을 제외하곤 모두 아들이었다. 그중에서도 내 남편이 첫 결혼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며느리’라는 존재로 처음 발을 들인 사람이다 보니 어른들이 상상해온 맏며느리 잣대에 나는 형편없이 부족한 사람이었으리라.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했는데, 결혼 이후로 여러 가지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맏며느리라는 자리는 결코 즐거운 자리가 아님을 실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미래의 동서를 기다렸다. 남편의 사촌 남동생들이 결혼해도 동서가 생기긴 하겠지만, 그보다는 남편의 친동생 즉 나의 시동생이 결혼해서 동서가 생기길 은근히 기다렸다. 어떤 사람이 동서로 올 지는 모르겠다만 뭘 해도 마음에 안 들고, 뭘 해도 착해 보이지 않는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생긴다면 이목이 분산될 거라 믿었다.

올해로 5년 차인 나와 시가 사이의 감정이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아서였다. 결혼생활을 글로 옮기며 시가 이야기가 드문드문 나오는 것도, 고이 키운 맏아들과 결혼생활을 하는 낯선 여자애가 연락을 잘하지 않는 것도, 여자만 주방에서 일하는 게 불공평하다며 함께 하겠다고 대쪽같이 고집을 부리는 것을 포함해 오만가지 사연이 내가 미움받는 이유였다.


물론 화가 나고 마음이 어그러진다 해서 그때마다 따박따박 반박해가며 불편한 자릴 만든 적은 없다. 다만 불편한 자리는 피하더라도 내가 쌓아온 가치관과 스스로의 역사를 무너뜨려가며 온순한 며느리 행세를 할 순 없었다. 그런 나는 고분고분하지 못한, 살갑지 못한 맏며느리였다. 동시에 나란 며느리는 시가 어르신들의 이야깃거리 줄곧 활용되고 있다.


그래서 기다림이 간절했다. 언젠가 시동생이 결혼해서 나와 비슷한 입장의 동서를 맞이한다면 얼마나 좋으려나, 그런 막연한 기다림이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기대하는 바도 생겼다.

‘아, 미래의 동서가 외국인이면 좋겠다. 굳이 형의 아내란 이유로 형님 소리 들을 필요도 없는데, 호칭은 편하게 서로 이름 부르면서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자주 볼 것도 없이 용건 있거나 서로 안부 궁금하면 만나서 술이나 한 잔 하고, 그런 동서지간이면 좋을 텐데.’


하지만 집안에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한 가족이 되는 데 기대를 품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악독한 사람만 아니어도 다행인 것이다. 그저 건강하기만 해도 감사한 것이다. 내 기대는 아무 의미 없는 상상의 나래였다. 분명 그렇게 여겼는데,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정말로 나의 시동생이 외국인과 결혼을 발표한 거였다.


언젠가 시동생에게 여자 친구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실제로 얼굴을 본 적은 없어서 결혼으로 이어질 거라 생각도 못한 바였다. 시동생은 중국인 여자 친구와 미국 유학 중에 만나 유학을 마치고도 장거리 연애를 이어가며 6년간 애틋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 와중 시동생이 중국에서 인턴생활을 하고 취직도 하게 되면서 둘은 결혼해 중국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로 약속한 모양이었다.


결혼이 결정된 후 시동생이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필요한 일들을 처리했고, 지난 초가을 여자 친구와 함께 우리 집에 방문하겠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예비 동서를 만날 기회였다. 게다가 상상의 나래 속 외국인 동서라니! 어떤 사람일지 궁금하고, 왠지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들고 설렘이 가득했다.


두근거리는 가운데 방문하기로 한 날이 가까워왔다. 듣기로는 예비 동서가 미국과 프랑스에서 몇 년씩 유학을 해서 외국어가 아주 유창하다고 했다. 시동생과 대화는 영어와 중국어로 한다고 들었다. 우리 집에 오면 아마도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을 터였다. 영어로 대화를 하게 될 풍경이 몽글몽글 떠오르는데, 순간 이 갑갑함은 무엇일까.

‘나 영어 못 하는데 어쩌지. 나만 말 못 하고 벙어리처럼 있으면 어쩌지. 큰일 났네. 전화영어라도 해야 하나.’


하지만 전화영어를 한다 해서 당장 며칠 만에 예비 동서와 유창하게 대화할 리는 만무했다. 며칠 고민하다가 일단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넘기며 어떤 음식을 준비할지 식단을 고민했다. 언젠가 책에서 한국을 찾은 외국인에게 우리 문화라며 낯선 한식과 매운 음식을 마구 대접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읽은 기억이 났다. 외국생활도 오래 했으니 양식이 무난하지 않을까 싶었다.


요리책을 정독하며 준비한 메뉴는 투움바 파스타와 라따뚜이, 샐러드였다. 다과상에 놓을 아몬드 튀일도 직접 구웠다. 영어실력은 미처 준비 못했지만 음식은 준비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나마 잘 보이고 싶은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이윽고 초인종이 울리고 시동생과 예비 동서가 들어왔다. 웃는 얼굴이 천진하고 밝은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예비 동서였다. 집에 들어오자마자 인테리어가 예쁘다고 칭찬하는 센스도 있었다.


예비 동서의 이름은 샤오(풀 네임은 길어서 이름 중 한 글자만 공개하기로)였다. 짧은 영어로 샤오에게 인사를 했다. 샤오도 내 이름의 한 글자를 부르며 인사했다. 이렇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게 됐다. 나와 남편, 시동생과 샤오 이렇게 넷은 이름 마지막 글자로 서로를 호칭했다. 서열과 나이가 의미 없는 이 관계는 모두의 마음을 홀가분하게 했다.

준비한 메뉴로 점심식사를 시작했다. 자리에 앉았는데 투움바 파스타에 고춧가루를 넣은 게 문득 떠올랐다. 혹시나 매운 음식을 못 먹으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고, 마음속 생각과 짧은 영어실력에 긴장이 잘 버무려져 엉뚱한 질문을 하고 말았다.

“샤오, 혹시 디스 파스타 스파이시하니?”


영어로 물어볼 거면 통째로 영어로 하던가, 한국어로 물을 거면 한국어로 편하게 묻고 통역을 부탁하면 될 것을 긴장한 나머지 이 말도 저 말도 아닌 질문을 한 거였다. 게다가 긴장한 탓에 반말까지 하다니. 내 볼이 파스타처럼 주홍색으로 물드는 게 느껴졌고, 다시 영어로 고쳐 물었지만 마음속엔 이미 다짐이 시작됐다.

‘말을 말자, 말을 말아야지……. 이게 웬 망신이야.’


이후 식사와 다과 시간을 가졌고 샤오는 우리에게 결혼식을 예정한 예식장 영상을 보여주고, 농담도 곧잘 했다. 신혼집을 준비하며 구입한 로봇청소기에 굉장한 만족감을 보이며 적극 권장하는 모습도 귀여웠다. 이렇게 밝고 반듯한 성품의 사람이 한 가족이 돼서 얼마나 다행이고 기쁨인가 싶었다.


시동생과 샤오가 오후 늦게 돌아간 뒤 남편도 동생 내외의 모습에 마음이 편해진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평소보다 말이 없던 나를 놀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여보가 그럴 성격도 못 되지만, 동서에게 갑질 하고 싶어도 못 하겠다. 말이 잘 안 통해서!”


주홍색으로 물든 얼굴이 채 식지도 않은 나는 저녁 내내 불타는 부끄러움을 품고 있어야 했다. 언어장벽이 높은 동서를 만나게 되다니! 앞으로 긴 대화는 못 할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훗날 동서지간에 긴 대화, 긴 시간은 건강한 사이를 해칠지도 모르니 다행이라고 생각해봤다.

 

시동생과 동서가 우리 집에 올 때 사왔던 백주. 중국 분위기 뿜뿜하다!

이후 시동생과 샤오는 중국으로 돌아가 바쁜 와중에 결혼 준비를 열심히 했고, 지난 1월 초 예식을 올렸다. 결혼식 장소는 중국 수도에서도 먼 도시였고 남편의 회사 일정이 여의치 않아 우리는 참석하지 못했다. 대신 조만간 한국에서 만나 좋은 자리를 갖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나에겐 동서가 생겼다. 비록 거리가 멀어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게 고작이겠지만, 비슷한 입장을 가진 누군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기쁜 일이다. 손위 동서인 나 역시 며느리라 속상한 일이 생기면 가장 공감할 사람으로서, 남편의 형제에게 기대하는 바를 털어놓을 대상으로, 한 번씩 만나면 반가울 누군가로 존재하고 싶다. 이런 마음을 전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언어장벽이 두툼한 관계로 한글로 적는다.

잘 부탁해, 나의 동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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