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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pr 20. 2018

오늘의 메뉴

여보! 오늘 저녁은 뭐야?

결혼 전 남편이 내게 요리를 해준 적 있다. 당시 남자 친구였던 내 남편은 굳이 내게 떡볶이를 해주고 싶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아마 당시의 남편에게는 연인끼리 하는 알콩달콩한 요리 풍경, 그런 모습의 ‘로망’이 있던 것 같다.


이날 먹은 떡볶이는 우리 결혼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양 조절을 잘 못하던 남편은 큰 냄비 가득 떡볶이를 만들었다. 그 떡볶이는 아무 맛이 안 났다. 정말 이상하리만치 아무 맛이 안 났다. 그냥 짜거나 맵거나, 달거나 맛이 별로인 정도가 아니라 정말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숭늉 같은 떡볶이를 만든 남편이 신기할 정도였다. 어쩌면 훗날 요리 담당을 피하기 위한 남편의 빅 픽쳐가 아니었을지.


게다가 그 떡볶이는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고 오히려 불어나는 신기한 재주까지 부렸다. 그 떡볶이를 먹느라 나는 정말 고생했고, 남편이 상처받을까 봐 속내를 표현도 못 했다. 그리고 결혼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요리는 내가 맡게 됐다. 정확히는 내가 ‘맡아야만’ 했다.


맛을 내는 건 내가 조금 더 잘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지만, 무슨 요리를 해야 할지 감을 못 잡던 시절이었다. 나는 계획 없이 장을 보러 가서 신선해 보이는, 좋아 보이는 식재료를 일단 사 왔다. 그리고 식재료를 바라보며 무슨 메뉴를 만들지 고민했다. 이제 생각해보면 순서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나중에 요리책을 몇 권 구입하고 세상에는 정말 많은 요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내 요리 방식의 문제점도 알게 됐다. 이를테면 야채장에 가서 단호박을 사 왔다. 단호박을 쪼개 구워 먹고, 다음날 남은 단호박을 활용해 수프나 조림을 해도 되는데 나는 또 굽기만 했다.


혹은 잡채를 만들기 위해 당근을 샀는데 반개만 쓰고 한 개 반이 남았을 때, 다음날은 그것을 활용해 카레나 다른 볶음요리를 하면 된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런 생각을 못 해서 당근을 썩혀 버리거나 다시 잡채를 했다.


정말 기가 찰 정도로 융통성이 없었다. 식재료가 조금씩 남아 버리는 일도 자주 생겼다. 블랙 올리브 통조림이나 케이퍼 같은 재료는 먹으려고 사놓고 절반 먹으면 성공이다. 나는 알뜰주부가 되고 싶은데 낭비 주부가 된 것 같았다.


‘나는 왜 이렇게 요리 준비가 잘 안 될까?’하고 고민하며 저녁 메뉴를 생각하던 어느 날,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미리 식단을 짜보는 것이었다. 일단 이틀 정도의 식단을 짜 보기로 했다. 그러면 필요한 재료를 미리 정리할 수 있고, 이틀 정도 이어서 재료를 사용할 계획을 짤 수 있었다.


자주 쓰는 노트를 꺼내고 요리책을 쌓아두고 어울리는 요리들을 적어봤다. 찌개가 매콤하다면 반찬은 담백한 것을 찾고, 한 그릇 메뉴를 만든다면 곁들이기 좋은 국물이나 샐러드를 찾아봤다. 고기 요리를 만들면 다음 날은 가볍게 채식메뉴를 넣어본다.


식단을 짜다 보니 일주일 정도는 미리 짜는 게 가능했다. 한 주 동안 먹을 식재료도 대강 알 수 있었고, 여러 날 나눠 쓸 재료의 양도 정하게 됐다. 내가 생각해놓고도 스스로 얼마나 대견했는지 모른다.


또 늘 비슷비슷한 요리를 먹는 날이 확실히 없어졌다. 요리책의 덕을 톡톡히 보기도 했지만, 있는 재료로 생각나는 대로 요리를 한다면 비슷한 요리만 먹어야 할 게 뻔하다. 계획하면서 식단을 짜고, 어려워 보이지만 한 번씩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면서 요리를 한 게 벌써 4년째다.

지금 집에는 11권의 요리책이 있는데, 홈베이킹과 못 먹는 식재료의 요리를 제외하곤 한 번씩 다 만들어봤다. 그래서 요리책을 쭉 둘러보면 그동안 우리 부부가 먹은 요리의 컬렉션을 보는 것 같아 보람찬 기분도 든다.


지난 주말에는 장을 보면서 토마토 한 팩을 구입했다. 개별 판매가 안 돼서 6개짜리 한 팩을 샀다. 다음날 이 토마토를 이용해 토마토 파르시를 만들었다. 토마토의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야채와 밥을 넣어 오븐에 굽는 요리다. 이때 파낸 토마토 속은 버리지 않고 통에 담아뒀다가 다음날 소스로 만들어 토마토 버섯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미리 계획을 해두면 버리는 것 없이 재료를 말끔하게 쓸 수 있다.


또 상추를 한 봉지 사 오는 날이면 식사 전 서너 장을 따로 봉투에 담아둔다. 이 상추는 다음날 아침 샌드위치를 만들 때 넣으면 딱 좋다. 샌드위치용 채소를 따로 사지 않아도 충분하다. 마늘쫑은 단으로 팔지만 한 단을 전부 다 반찬으로 만들기엔 많다. 절반은 볶아서 반찬으로 만들고, 다음날 식단은 마늘쫑을 넣은 오징어 불고기로 정해 본다.


일주일치 식단을 짜고, 마트에서 구입할 식재료를 미리 메모해 둔다. 마트에 가면 가능한 메모 중심으로 물건을 산다. 물론 계획에 없었다 해도 좋은 물건이 있으면 구입하지만, 계획하고 마트에 가면 충동구매가 거의 없다.


내가 식단을 짜며 요리하는 것을 아는 남편은 퇴근 후 전화로 늘 저녁 메뉴를 물어본다. 내가 식단을 짜는 게 남편에겐 소소한 즐거움이다. 흥겨운 목소리로 남편이 묻는다.

“여보! 오늘 저녁은 뭐야?”


이때 남편이 좋아하는 파스타, 돈가스, 부대찌개 등의 기름진 음식을 말하면 남편은 신나서 “사랑해!”를 외친다. 남편이 좋아하지 않지만 균형 잡힌 식단을 위해 넣는 메뉴로 곤드레나물밥, 얼갈이 배춧국, 야채조림 등을 말하면 영혼 없는 목소리로 “응, 맛있겠네.”를 말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메뉴는? 남편이 먹고 싶어 했던 오므라이스다. 야채와 해산물을 가득 넣어 볶은 밥을 달걀로 얇게 싸서 만드는 오므라이스. 여기에 따끈한 사골국을 한 그릇씩 담고, 잘 익은 깍두기와 나물 반찬을 곁들이면 괜찮은 저녁식사가 될 것 같다. 오늘도 남편은 전화로 신나게 “사랑해!”를 외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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