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늑대, 마크 롤랜즈

에세이 읽듯 편안한 철학서 <철학자와 늑대>

by 귀리밥

내가 유독 완독을 어려워하는 책이 있다면 철학과 경제다. 철학에 푹 빠지면 다들 그렇게 즐거워하던데, 나는 왜 이토록 철학이 어려울까? 유일하게 완독한 철학서라면 <김수영을 위하여> 정도였다. 그런 내게 <철학자와 늑대>는 아주 쉽고 간단하게, 그리고 감정을 어루만지는 방식으로 시간과 순간의 철학을 시사했다.



고통을 느끼고 다양한 감정을 즐기는 영장류는 인간만이 아니다. 다른 영장류도 사랑을 하고, 너무나 깊은 슬픔에 죽기도 한다. 다른 영장류도 단순히 동료가 아닌 친구를 가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성향을 영장류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영장류는 다른 동물이 아닌 자신들만 그럴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아는 한 다른 동물에게는 없는 영장류 고유의 인지발달을 근거로 삼아 그렇게 여긴다. 세상과 그 속에 사는 존재를 오직 비용-편익 관점으로만 보는 성향, 누군가의 삶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들을 계량화하고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성향은 오직 영장류만 가질 수 있다. 모든 영장류 중에서도 이 성향이 가장 복잡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인간이다



그렇다면, 전부는 아니지만 최소한 우리 중 일부는 왜 개를 사랑하는가? 나는 왜 브레닌을 사랑했는가? 곰곰 생각해 보니 이런 비유가 좋겠다. 개들이 우리 인간의 영혼 속에 오래도록 잊혀져 있던 깊은 구덩이를 파내기 때문이라고. 그 구덩이 속에는 영장류가 되기 이전의 우리가 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한때 늑대였던 우리의 모습이다. 이 늑대는 행복이 결코 계산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이 늑대는 진정한 관계는 결코 계약에 의해 성립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먼저 신의가 있다. 이것은 하늘이 무너져도 지켜야 한다. 계산과 계약은 항상 그 다음이다. 왜냐하면 우리 영혼 속의 영장류는 결코 늑대보다 먼저 나타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읽는 동안 늑대와 사람의 비교가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나쁘다는 게 아니다. 물론 늑대가 절대적인 기준도 아니다. 우리가 타락해서 그렇다. 서로를 계산하고 비교하고, 의심하느라 순간을 살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또 하나 확실히 깨뜨릴 수 있던 점은 인간의 우월함에 대한 착각이다. 인간의 위대함을 찬양하며 마무리하는 책이 많다.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의지와 지능, 문명 등에 대해 논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나 인간 기준이다. 동물이 보기에 인간이 우월하고 대단해 보일지 알 수 없지 않나. 그러니까 동종에 관해서는 우월을 따질 수 있을지언정 다른 종과 비교해 인간이 우월하다고 단정하는 건 모순이 많다.


특히 얼마 전 읽었던 어떤 콘텐츠가 떠올랐다. 인간이 기르기에 적합한 견종을 추천하는 내용이었다. 추천받은 견종은 인간과 살아도 스트레스가 덜해 키우기 좋다고 했다. 마치 그 견종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기술해 놨다. 그건 말도 안 된다. 우리가 같은 존재가 아닌 이상 그 스트레스와 감정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우린 짐작만 할 뿐이다. 정의할 수 없다.


이게 바로 인간이 가진 우월함의 착각이다. 우리가 아무리 연구하고 과학적 잣대를 들이민다 한들 다른 종의 마음과 의견을 온전히 파악하긴 어렵다. 그러니 그 우월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먹이사슬의 꼭대기가 사람? 절대 아니다. 무기와 장비 없이 밀림에 떨어져 봐라. 인간은 피라미드의 중간 어디쯤이다.

늑대는 매 순간을 그 자체의 보람으로 받아들인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 영장류가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인간에게 매 순간은 끝없이 유예된다. 매 순간의 의미는 다른 순간과 연관되어 있으며 그 내용 또한 다른 순간들로부터 회복될 수 없는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시간의 피조물이지만 늑대는 순간의 피조물이다. 우리에게 순간이란 투명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물질을 소유하려 할 때 그 사이로 손을 뻗는 것과 같다. 시간은 투명하게 비치는 것이다. 우리에게 순간은 절대로 완전한 현실이 아니다. 순간은 거기에 없는 것이다. 순간이란 미래와 과거의 유령이다. 과거에 일어났던 것들의 메아리이며, 앞으로 일어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기대일 뿐이다.


매 순간을 살라니 얼마나 멋진가. 인간이 순간보다 시간에 얽매이는 건 확실하다. 다행히 요즘은 순간, 오로지 현재를 즐기는 이들도 많긴 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누군가는 말한다.

“저러다 늙어 고생이지.”

그러니까. 우리는 이렇게 늙어 고생할 시간을 염두에 두며 산다. 결국 우리가 만든 문명과 사회구조가 있고 그 안에서 생존하는 인간은 순간보다 시간을 걱정하며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브레닌은 나에게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계산이 실패할 때 남는 내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좌절되고, 거짓으로 지껄이던 말들이 목에 걸려 나오지 않을 때 말이다. 결국 끝에 가서는 철저하게 운만 남는다. 그리고 신들은 운을 주었을 때처럼 언제든지 앗아 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운마저도 다했을 때 남겨질 나 자신이다.


위 문구는 책의 거의 끝자락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서 나는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시간이 쌓아놓은 것은 일상에 매우 중요하지만, 쌓아놓은 것이 무너질 때 혹은 사라졌을 때 남는 것은 결과를 쌓아가던 나의 순간이란 것이다. 우리가 미래를 걱정하며 시간싸움을 벌이는 대신 순간을 아름답게 만든다면 혹여나 미래가 개떡 같더라도 아름다운 순간을 기억하고 오롯이 내 것으로 가질 수 있다.


어느 주소에, 몇 살로, 이름에 어떤 한자를 쓰며, 신체적 조건은 얼만큼의 숫자로 기록되며 살아가는 내 현주소에 순간을 얼마나 갖고 있었나. 기록할 수 있는 나의 조건은 현재를 말하지만 억압된 순간이기도 하다. 순간의 나를 기억하고 싶다. 여러 색깔의 순간들이 내게 분명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키우던 개 생각이 많이 났다. 저자가 늑대 브레닌이 늙어 죽어갈 때 슬퍼하던 모습에서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옛 생각이 나서 철학서를 읽다가 눈물이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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