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세상의 모성이 모두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by 귀리밥

예전에 운영하던 동호회에서 책 교환 행사를 한 번 했다.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혹은 누군가에게 주고 싶은 책을 하나씩 가져와서 제비뽑기로 책을 주는 거였다. 아마 자신의 취향이 잘 드러나면서 타인에게 선물해도 부끄럽지 않을 책을 하나씩 들고 왔으리라.


나는 뭐 말할 것도 없이 하루키의 수필을 들고나갔다. 그날 내가 받은 책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한국 작가의 소설이었는데, 굉장히 하드한 고어물이었다. 첫 장에서부터 피가 튀고. 아, 그냥 피만 튀면 괜찮은데, 아주 세부적인 신체의 일부가 나달나달 그려지는 지독한 하드고어였다.


그 책을 내게 준 언니는 나랑 그리 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책을 주면서 하는 말이 “이 책을 들고 오면서 누군가에게 주게 된다면 꼭 너에게 주고 싶었다.”면서 “읽고 어땠는지 후기를 듣고 싶다.”라고 했다.


대체 어떤 책이기에 나를 콕 집어 주고 싶다는 걸까, 기쁜 마음으로 받아 들고 집에 와서 읽었는데 한 30페이지쯤 읽고 덮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내게 이 책을 주고 싶었는지 화딱지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대체 나를 뭘로 본 거야, 이렇게 살점 찢어대는 이야기를 왜 내게 주고 싶었던 거야. 정말 알 수 없었다. 한동안 내 고민거리가 그거였다. 나란 사람이 어떻게 보이기에 이렇게 끔찍한 소설을 주고 싶어 한 건지 말이다. 속을 털어놓을 정도로 친한 사람에게 이 일을 상담할 정도로 내게는 충격이었다.


다음에 모였을 때 그 언니는 내게 후기를 물었는데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30페이지 정도를 겨우 읽었으니 할 말도 없었지만, 그걸로 쏘아붙이기엔 못돼 보일까 봐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수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그 언니가 새삼 혜안이 있는 사람이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어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읽고 느낀 건데, 나는 지저분하고 징그러운 하드고어는 싫어하지만 그 고어가 발생하기 직전까지의 갈등 상황을 굉장히 좋아한다는 거다. 서로 증오하고 혐오해서 어떤 기이한 사건과 현상이 나타나기까지의 갈등 상황과 원인에 엄청난 관심이 있고, 즐긴다는 점을 어렴풋이 느꼈다.


그래서 그때 그 언니가 나의 이런 면을 꿰뚫어 보고 있던 건 아닌가 그런 생각도 들고 말이다. 소설의 결말은 버라이어티 하지 않았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여지 하지만 나름 구체적인 여지를 남겼다. 이북 끄고 나서도 계속 상상했다. 그리고 몇 년 전 그 징그러운 책을 전해준 언니의 속내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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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소설을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조금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야기는 남녀가 문란하게 서로를 탐색하기보다 진지하게 대하고, 자녀를 여덟 명쯤 낳아 키우고, 커다란 빅토리아풍 집에 살며 중산층으로 살고 싶었던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만남에서 시작한다. 이때부터 이들이 가진 무거운 이상향이 잘 드러나는데, 다섯째 아이의 문제는 이미 여기서부터 시작됐을 것이다.


행복. 행복한 가정. 로바트 가는 행복한 가족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었고 누릴 자격이 있었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얼굴을 맞대고 누워 있으면 때로는 그들의 가슴속 대문이 활짝 열리면서 아직도 자신들을 놀라게 할 만큼 엄청나게 강렬한 안도감과 감사의 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아주 오랜 기간처럼 보이는 그 시간 동안 인내하기란 사실 쉽지 않았다.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60년대의 시대정신이 그들을 비난하고 고립시키고 자신들의 가장 좋은 면을 축소시키던 때에,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기가 어려웠었다.


주변에서 반대를 해도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계속 아이를 낳는다. 이미 그들이 즐기고 행복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애초에 목표한 바가 있으니 꼭 완수해야 할 것처럼 텀을 두지 않고 자꾸 아이를 낳는다. 그 과정에서 해리엇의 친정엄마는 딸을 돕기 위해 수년간 희생해야 했고, 자녀가 많고 집이 큰 덕에 데이비드의 아빠에게 경제적으로 독립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호텔처럼 큰 집이 있기에 온갖 친척들과 가족들이 몰려들어 일 년에 몇 달씩 머무른다. 그들은 젊은 부부에게 이런저런 잔소리와 참견, 주는 것 없이 받기만을 원하는 몰상식한 모습을 보여준다. 솔직히 내 성격이면 다 내쫓아버리고도 남는데, 이 역시 젊은 데이비드와 해리엇에게는 이상향 중 일부였기 때문에 돈이 얼마가 들어도 참고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문제의 다섯째 아이를 임신한다. 이 다섯째 아이로 인해 겉면이나마 잘 유지하고 있는 화목하고 즐거운 가정이 파괴된다.


그녀는 멍이 들었다 —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내부에 엄청나게 거대한 큰 멍이 들었을 것이라는 점을 — 그리고 아무도 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예정보다 빨리 태어난 다섯째 아이 벤은 태어난 순간부터 보통이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보통은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물론 가족들이 생각하는 평범의 기준치와 다르다는 거다. 사람들이 기대하던 아이와 전혀 다른 다섯째 아이는 폭력성과 기괴함을 지녔다. 그런 아이를 낳았다는 점에 대해 해리엇을 자꾸 자신이 공격받는 기분이 든다. 모두 자신을 탓한다고 느낀다. 친척들은 빅토리아풍 저택에 발길을 끊고, 먼저 낳은 네 아이들도 막내를 싫어한다.


아이가 두 살이 됐을 때 비정해 보이지만 데이비드와 다른 친척들이 뜻을 맞춰 아이를 요양소에 보낸다. 말이 요양소지 어린아이에게 구속복을 입히고 약을 주사한 뒤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곳이었다. 예상했겠지만 해리엇은 요양소에서 아이를 구출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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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에 대해서 나와 남편은 이야기를 나눠봤다. 남편은 아마 자신도 요양소에 보내는 결정을 했을 거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내와 충분한 소통과 합의 후에 가능한 거라고 의견을 내놨다. 거기에는 나도 동감했지만, 너무 바보스러워 보이는 해리엇의 그 행동 – 요양소에서 데려오는 모습 –은 아마 같은 상황의 나라도 그랬을 거라 생각이 들었다. 책에서는 이것을 전통적인 모성애로 그려내는데, 나는 모성애라기 보단 아주 기초적인 도덕적 잣대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해리엇은 아무리 이상한 아이라도 자신이 낳은 자식을 책임져야 한다는 당연한 선택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행동으로 인해 해리엇은 이 가정을 파괴하는 데 일조한 입장이 되고 만다. 전혀 다른 두 가지 입장이다. 다른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막내를 포기한 데이비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을 책임져야 한다는 해리엇. 둘 중 무엇이 옳다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을까?


가정은 점점 와해되고 소설의 후반부에는 늙은 해리엇과 소원해진 데이비드, 신경쇠약 상태인 넷째 아이와 폭력적이고 짐승 같은 다섯째 아이 벤의 모습이 그려진다. 해리엇은 벤의 행복한 상태를 상상하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폭력을 저지르고, 경찰 구치소에 잡힌 막내의 모습, 혹여나 성범죄라도 저지르게 될 벤의 모습을 상상한다. 끝끝내 해리엇은 벤을 사랑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 자식이지만 두렵고, 불편하고, 하지만 책임져야 한다는 단호함만 있을 뿐이다. 그것을 모성이라 표현한다면 세상의 모성이 모두 아름답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래도록 생각해온 게 하나 있었다. 부모가 반드시 자식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자식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늘 그게 궁금했다. 지친 표정으로 망가진 자식을 책임지는 부모의 얼굴, 자식을 대신해 굴욕의 현장에 서있는 부모의 표정을 사는 동안 매스컴을 통해 여러 차례 봐왔다. 이 소설에서 반쯤 열린 결말로 끝난 것처럼 그들에게도 정답은 없었을 거다. 그리고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이상향, 왜 거기에는 벤이 없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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